어떤 의미에서 1980년대의 한국영화는 <
바람 불어 좋은 날>(1980)과 <
꼬방동네 사람들>(1982)로 시작해 <
우묵배미의 사랑>(1990)으로 끝난다. 1980년대는 민중의 삶이 대중영화 안에 존재했던 마지막 시기였다. 민중이 제기했던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 없이 1990년대는 시작됐고, 급조된 사회 변화가 한국영화에 시답잖은 영향을 끼친 결과였다. 그나마 1980년대를 낭만적으로 회고하던 대중문화가 섣불리 1990년대로 돌아선 지금, 나는 1980년대의 영화를 꼼꼼하게 되돌아볼 필요성을 느낀다. 거기에는 버리지 말아야 했으나 버려버린 시간의 흔적이 생각보다 차지게 배어 있다. 하나하나 꺼내볼 때면 남다른 기분을 주는 1980년대 한국영화 가운데
이장호의 <
과부춤>이 있다. 흥행에 실패해 변두리 상영관에서 동시상영의 운명을 맞던 즈음, <과부춤>과 나는 만났다. 영사실에서 실수를 했는지 의심했을 정도로 괴상한 영화였다. 첫 기억은 그랬다.
<
과부춤>은 이동철의 원작소설 <오과부>를 각색한 작품이다. 당시
이장호는 이동철의 <
어둠의 자식들>을 3부작으로 만들기로 화천공사와 계약한 상태였는데, 복잡한 시대상황 탓에 영화 작업 또한 어지럽게 진행되던 터였다. <어둠의 자식들>의 1부(1981)는 흥행에 성공했으나, 검열기관은 <어둠의 자식들>의 2부를 애초부터 허용하지 않았다. 속편 격인 내용을 자유롭게 바꾸어 나온 영화가 <
바보선언>(1983)인데, 문제는 흥행 실패를 우려한 영화사에 의해 <바보선언>의 필름이 1년 넘게 창고에서 썩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형편에 <바보선언>보다 뒤에 만들어진 <과부춤>이 극장에 먼저 걸렸다. 그러나 1984년 설 연휴에 개봉된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하고 만다.
1970년대 흥행감독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장호는 1980년대 들어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
바람 불어 좋은 날>로 근사하게 출발했으나, 관객은 그의 영화를 사랑했던 만큼 어떨 때는 철저한 무관심으로 대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장호가 슬럼프의 시기에 발표해 상업적으로 실패한 작품 중 몇 편은 이후 그의 걸작으로 남게 된다.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
과부춤>과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가 그런 작품이고, 나중에 개봉돼 흥행에 성공했으나 한동안 버려졌던 <
바보선언>도 마찬가지의 경우다. 이장호의 실험정신이 깊이 반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세 작품은 하나로 묶인다. 요즘 영화와 비교해 실험이라 부르기에 부족한 부분이 많고, 형식과 내용이 적절하게 섞이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최소한 세 영화가 시대를 앞서 갔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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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춤>은 몇 장의 사진과 현실의 이미지를 교차하며 시작한다. ‘한국에서 개최된 1980년 미스 유니버스, 스포츠 경기에 몰린 관중들, 외국인 관광객, 강남 아파트의 청사진’과 ‘산동네를 오르는 여인, 거리의 손수레 상인, 집 없는 아이들, 노동 중인 일용직 근로자’를 앞뒤로 배치한 도입부는
이장호의 선명한 선언에 다름 아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민중의 삶에 관심을 가지다 깨달음을 얻었던 이장호는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은 영화를 찍고 싶었다. 그 시작이 <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으며, <과부춤>은 <
어둠의 자식들>과 <
바보선언>을 절충한 영화에 해당한다. 밑바닥 삶을 사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어둠의 자식들>에서, 전례에 드문 과감한 형식은 <바보선언>에서 각기 따왔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거침없는 형식미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요하는 장면이나 일상을 담은 장면은 저속촬영을 통해 자유자재의 속도로 내달렸고, 필름의 속도와 별개로 인물의 음성을 재잘대는 하이 톤으로 변조했다. 흡사 이야기를 압축한 듯이 빠른 속도감을 느끼도록 만든 것인데, 단연 두드러진 효과는 무성영화에서나 봄 직한 슬랩스틱의 맛이다.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튀어나오는 슬랩스틱은 상식에서 벗어난 코믹한 상황이 현실의 비극과 만나 빚는 아이러니를 표현하는 데 그만이며, 리얼리즘 영화를 추구한다던
이장호가 난데없이 구사한 형식미는 그 순간에 답을 구한다.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지는 않으나 <
과부춤>은 3개의 부분으로 구성된 영화다. 말숙이 주인공인 1부, 말숙의 올케가 등장하는 2부, 에필로그로서의 3부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된다. 하지만
이장호는 세 부분의 이야기를 구속해 통일감을 기하기보다 각각 개성 넘치는 성격을 부여해 헐거운 느낌을 살렸다. 일례로, 말숙이 재일교포 미망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장면은 일본풍의 음악과 단순한 실내를 배경으로 모던하게 표현됐다. 현실과 유리된 분위기에서 조작된 허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밖에 올케의 집에 세 든 조씨가 창을 한다는 점을 착안해 짧은 판소리 장면을 두 번 삽입했고, 말숙의 오빠가 교통사고로 죽는 장면과 올케의 흑백 악몽 장면을 오가며 극의 긴장감을 더했다. 민중을 주인공으로 삼은 1980년대 영화의 한 아이콘인 김영동의 음악은 영화의 여러 형식 사이로 넘나든다. 그의 장기인 모던한 국악은 물론, 국악과 재즈를 결합한 실험적 사운드는 일품이다.
실험적인 양식이 먼저 눈에 띄는 영화지만, <
과부춤>의 주제는 1980년대의 시대정신에 있다. <과부춤>의 진정한 가치는, 절박한 1980년대의 중심에서 뽑아낸 표정이 오롯이 살아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한방살림을 하는 가정에서 중년의 남편과 아내가 아들과 딸 몰래 힘겹게 몸을 섞는 장면은 눈물과 웃음을 동시에 끌어낸다. 미래를 낙관하지 못하는 청년은 실의에 빠져 지내고, 어린 소녀들은 살림에 보태려고 공장에서 야근도 마다치 않고 일한다. 그런가 하면 하층민을 등쳐먹는 사기꾼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여공이 재봉틀을 돌리는 시간에 술집과 나이트클럽은 손님으로 넘쳐난다. 1980년을 끝으로 스크린에서 사라진 풍경 중 가장 소중한 것은 ‘노동의 시간’이다. 심각한 착취 구조 아래에서도, 민중은 육체적 노동을 통해 삶을 지탱했다. 같은 현장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몸을 부려 밥벌이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연대의 의식이 존재했다. 그것은 또한, <과부춤> 같은 영화가 1980년대를 끝으로 스크린에서 사라진 이유이기도 하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부의 축적은 소수의 계층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1980년대가 도래하면서 사정은 달라진다. 부동산과 주식 시장의 폭발은 저마다 눈에 불을 켜고 부를 축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국사회에서 1억은 도달하기 힘든 부를 뜻하는 심리적 경계였다. 그런데 1990년대가 열리기 전부터 부동산시장과 주식시장은 가파른 속도로 성장했고, 개인이 억을 향유하는 게 가능해졌다. 집 한 채 장만하는 게 꿈이었던 서민들은 어느새 부동산 거래로 거금을 쉽게 벌어들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으며, 198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주식 거래에 관심조차 없었던 보통사람들이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 1980년대의 신군부 정권이 개인의 의식에 물들인 천박함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자기 잇속을 차리기에 급급한 자의 머릿속에는, 함께 노동하는 자들의 연대의식 같은 게 끼어들 틈이 없다. 이제 우리는 사라지고 나만 소중하게 여기는 시대가 성큼 닥쳐온 것이다. 민중의 개념이 다수의 중산층 의식에 자리를 내주고만 현재, <
과부춤>이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 타자의 이야기로 추락하는 건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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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불어 좋은 날>을 보고 영화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는 장선우는 <
우묵배미의 사랑>에서 자신의 본령을 분명히 밝힌다. <우묵배미의 사랑>의 한 장면은 1980년대의 끝자락을 예리하게 집어낸다. 주인공 배일도 부부는 허름한 용달차에 몸과 짐을 싣고 이사를 떠나는데, 용달차는 하필 강남을 통과한다. 거대한 아파트촌, 확 트인 대로, 코엑스 건물과 올림픽대교가 위용을 뽐내지만, 서울 변두리에서 경기도 촌동네로 이사 가는 그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꿈에서도 누릴 수 없는 완벽하게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 장면은, 우리의 시대와 우리의 세계가 1980년대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고 말한다.
이동철이 쓴 <오과부>는 따로 살면서도 연대의 의식 아래 공동체를 꾸리는 다섯 과부에 관한 이야기다. 누가 썼는지 알 수 없으나, <오과부>라는 제목 밑으로 ‘우리 이웃들의 삶을 솔직하게 기록함으로써 부끄러움을 진솔한 감동으로 바꿔놓은 이야기’라는 해제가 붙어 있다. 영화 <
과부춤>의 클라이맥스는,
이장호가 해제 중 ‘우리’라는 말에 주목한 끝에 획득한 보물이다. 에필로그의 뒷부분, 골목에 쓰러진 임산부가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한다. 행복한 얼굴의 사람들은 자기 삶을 꾸리느라 그녀를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한다. 실의에 빠져 아이를 업고 오던 말숙이 마침내 그녀를 발견하고 일으켜 세운다. 내가 사랑하는 장면은 그 다음이다. 여인은 과부들의 도움으로 아이를 출산하고, 과부들이 그녀 곁에서 각자의 표정을 짓는다. 행복함과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이 장면은 예수의 탄생을 축복하는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억하게 한다. 도시빈민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들(이동철도 그 중 한 명이었다)을 만나면서 이장호는 많은 종교적 위안을 받았으면서도, 정작 그의 영화에서 현실 기독교의 모습은 아름답게 그려지지 않았다. 이장호가 기독교에 대해 품었던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게 <과부춤>의 출산 장면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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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부춤>은 산동네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끝을 맺는다. 눈이 내리고, 산동네는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다. 한쪽 끝에는 포크레인이 개발을 재촉하며 섰지만, 끝없이 펼쳐진 산동네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안다, 가난한 자들이 연대했던 그 자리에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섰음을. <과부춤>은 다가올 시대가 어떻게 미쳐 돌아갈지 정확하게 간파한 작품이다.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세상이 걸어갈 것을 아는 젊은 작가
이장호는, 말숙에게 건네는 사기꾼 과부의 말을 빌려 세상에 경고했다. “앞만 봐, 세상을 보란 듯이 속여 보자구” 그러나 세상은 경고를 충고로 받아들였다. 아무도 뒤돌아보지 않았으며, 세상에는 속여서라도 잘 살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과부춤>을 다시 보며 쓰라림을 느꼈다. <과부춤>은 뜨거운 영화다. 반대로 요즘 한국영화들은 차갑다. 작금의 젊은 작가들에게 뜨거운 마음이 없다고 탓할 일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