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선우 감독의 세 번째 연출작 <
우묵배미의 사랑>(1990)은 서울에서 소일하다 예전에 살던 우묵배미로 다시 돌아간 배일도가 그곳에서 미싱사 민공례를 만나 벌이는 사랑과 불륜의 이야기를 회고담 형식으로 그려낸 영화다.
박영한의 소설 『왕룽일가』에 따르면 우묵배미는 “서울시청 건너편 ''''''''''''''''삼성'''''''''''''''' 본관 앞에서 999번 입석을 타고 신촌, 수색을 거쳐 50분쯤 달려와 낭곡 종점” 근처에 있는 변두리 마을의 이름이다. 김포 부근에 위치한 소읍으로 예전에는 완연한 시골이었겠지만 지금은 연립과 빌라의 신축 분양 광고가 줄지어 나부끼고 있는, 도시도 아니고 시골도 아닌 곳이다. 다만 영화에서는 ‘우묵배기’가 구리시 너머 어디쯤 위치한 것으로 보여 지는데 이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서울의 지속적 팽창이 마침내 인근 도시까지 파고들어 난개발을 유도한 결과 생겨난 동네가 ''''''''''''''''우묵배미''''''''''''''''이고, 영화는 그곳에 있던 원주민과 흘러들어온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난 이야기라는 점에서, 유사한 삶의 풍경을 간직한 곳이라면 어디라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남편의 학대와 힘겨운 노동 속에 사는 민공례와 “아무 남정네 앞에서나 절구통만한 엉덩이를 흔들어대고 헤프게 웃음 짓는” 천박하고 거친 아내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배일도 사이의 불륜을 어떤 구원처럼 묘사하고 있다. 추레한 공간과 남루한 삶을 전경화시키고 있음에도 이들의 불륜이 한 없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장선우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물게 균질적 완성도를 보여준다는 것인데, 다시 말해 전통과 현대, 고상함과 비속함, 비극과 희극, 육체와 영혼, 연민과 냉소, 카니발과 일상 등 대극의 세계를 통해 당대사회와 긴장하면서 교접하는 방식을 택해온 장선우 영화의 미학이, <
우묵배미의 사랑>에 이르러 정점을 찍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민공례와 새댁의 대극적 이미지를 통해 진일보된 계급투쟁의 방식을 보여주는 감독의 시선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결국 영화의 오프닝 신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이며 수동적인 여성의 몰락과 강하고 능동적이며 억센 투사형 여성이 지배하게 될 가까운 미래에 대한 눈 밝은 예언인 동시에, 샛길로 빠질 수밖에 없는 관계에 관한 친절한 안내서에 다름 아니다.
대립적 세계인 세 남녀 사이를 유영하며 그것들을 충돌시키고 화해시키는 동안 만들어내는 리얼리즘,
장선우가 장기로 사용해왔던 영화미학은 관객과의 거리를 제거하며 영화 속으로 빠져들도록 기능하고 있다. 예컨대 장선우는 새댁에게 붙잡힌 배일도가 옷이 찢겨진 채 끌려나오는 시퀀스와, 배일도의 고향집에 당도했을 때 마을 사람들이 마당으로 모이는 시퀀스를 카니발처럼 보여주고 있다. 이 제의(祭儀)는 가정에 안착해 일상으로 되돌아간 배일도와 생선을 발라줄 정도로 조신해진 새댁의 모습으로 이어지면서 관객의 정서적 참여를 추동한다.
진보적 영화주의자임을 자처했던
장선우는 시대를 앞서가는 비평가보다 한발 앞선 시선으로 영화를 찍었고 신인보다 더 결기 넘치는 방법을 통해 시대를 담아낸 인물이었다. 그런 점에서 <
우묵배미의 사랑>이 이룬 안정적이고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는 여타 그의 영화들과 비교할 때 이질적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장선우의 영화가 새로운 시기를 맞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이 영화에는 감독의 (민중을 소재로 하지 않은)다른 영화와는 달리 풍자와 조롱의 시선을 거두고 민중의 삶에 대하여 속살거리고자하는 장선우의 속내가 감지된다. 풍자와 비판이 도덕적이거나 하다못해 상상적 우월감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애초부터 우묵배미 민중의 삶은 풍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던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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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묵배미의 사랑>은
장선우가 고달픈 민중의 삶 속에서 길어 올린 사랑과 불륜의 정감어린 휴먼드라마이다. 동시에 그는 어느 추레한 술집 구석에 앉아 배일도와 민공례의 이야기를 엿듣거나 새댁의 악다구니를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받아넘기기도 하고, 배일도의 외도행각을 눈감아 주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식인의 형상을 한 검은 뿔테의 주인집 남자, 혹시 그가 장선우의 페르소나는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