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낙동강은 흐르는가 임권택,1976

by.장병원(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15-03-09조회 6,659
낙동강은 흐르는가 스틸

1970년대는 한국영화사의 암흑기로 알려져 있다. 유신 치하에서 검열의 서슬이 창작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국가주도형 철권통치가 예술의 자율성마저 말살했던 프로파간다의 시대. 그러나 문화가 권력의 발아래 있었던 이 시기를 야만의 기억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손쉬운 일반화이다. 그렇다면 암울하기 그지없었다던 1970년대 한국영화사를 무언가 새로운 상상력으로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동서고금의 영화사를 훑어보면 이데올로기를 강제 주입하려 했던 프로파간다가 부정적인 기능만 한 것은 아니다. 국책영화, 반공영화, 새마을영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1970년대 영화도 재조명될 여지가 있다. 임권택 감독의 1976년 영화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이러한 심증을 확증으로 되돌릴만한 작품이다. 물론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근대사의 부침 속에서 만들어진 반공영화이다. 당대 충무로 유력 제작자 중 하나였던 우진필름의 정진우가 제작하고, 이 영화를 통해 배우로 데뷔한 소년 진유영이 주연을 맡아 화제가 되었다. 국책을 지지하는 작품에 호의적이었던 당대의 분위기에서 원색적인 반공의 함의를 띈 이 영화는 13회 백상예술대상 감독상, 신인연기상 등을 수상했다. 

<낙동강은 흐르는가>의 최초 제목은 <작은 병사>였는데 가열했던 낙동강 전투의 유장함이 서린 지금의 제목으로 바뀌었다. 시나리오 집에는 ‘육탄십용사’라는 부제가 적혀 있는데, 이는 작사가 이영순이 만든 군가의 제목이기도 하다.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그 표제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한국전쟁의 끄트머리에 놓인 치열했던 낙동강 전투를 제재로 한 이야기이다. 길고 무더웠던 여름 석 달간 지속된 생사의 전장에서 남한의 열일곱 살 소년 병사 천 이병(진유영)이 치른 전쟁 체험을 요체로 한다. 대구를 목전에 두고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던 남한군이 죽음을 불사하고 육탄으로 교량사수에 목숨을 바치는 과정이 장렬하게 묘사된다. 국책, 반공의 색채가 현저함에도 불구하고 <낙동강의 흐르는가>가 인상적인 대목은 예술과 프로파간다의 관계, 1970년대 한국영화계가 감당할 수 없었던 프로덕션의 완력이 곳곳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천 이병은 남한 병사이지만 좌우 이데올로기에 오염되지 않은 앳된 소년으로 설정되어 있다. 일가친지들의 좌익운동 가담으로 식솔들이 험난한 고초를 당했던 임권택은 소년의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이념을 갈등의 축으로 설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전쟁의 원인을 초점화하기보다는 전쟁이라고 하는 사태로 말미암은 참상을 무구한 소년병의 시점으로 묘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낙동강은 흐르는가>에서 주목할 것은 1970년대 한국영화 산업의 현실과 괴리가 느껴질 만큼의 압도적인 스케일이다. 국책을 지지한다는 미명 하에 이 영화는 국방부로부터 전폭적인 제작지원을 받게 된다. 여러 차례 되풀이되는 전쟁 장면에서 프로파간다가 예술에 육화되는 과정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직업 감독으로 10여 년간 경험을 쌓았던 임권택은 영화 안에서 제작의 호조건을 십분 활용하는 능란한 기능공의 면모를 보여준다. 국방부의 지원을 받은 실제 탱크는 물론 전투 장비와 군중 신에 동원된 엑스트라는 요즘 한국영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규모이다. 

군으로부터 받은 장비 지원은 ‘리얼리티’의 충실함을 살려내는데 크게 한 몫하고 있다. 포탄이 빗발치는 한 전투 장면에서 진유영은 전후방으로 오락가락하는 실제 탱크의 밑을 오가며 곡예와 같은 액션을 수행한다. 후일 증언에 따르면 죽음을 각오하고 했다는 이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프로파간다 예술의 불가사의한 힘이 절감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기술적 트릭에 의존하지 않고 전투 장면의 리얼리티를 창조하는데 있어서 <낙동강은 흐르는가> 만큼의 성취를 보인 영화는 많지 않다. 일사불란한 군중 액션 연출은 예술적 자의식을 각성한 뒤 임권택이 만든 <개벽>이나 <태백산맥> <춘향뎐> 같은 영화의 고난이도 군중 신을 예고하고 있다. <낙동강은 흐르는가>는 임권택이 먹고살기 위해 영화를 찍었던 직업 감독의 노선을 변경한 마지막 시기 작품이기도 하다. 경멸의 시대가 남긴 한 유산으로 남은 이 영화는 선전선동의 프로파간다도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길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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