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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
Heo Yeong / 許泳 / 1908 ~ 1952
대표분야
감독
활동년대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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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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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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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와 나(君と僕)
허영
허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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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Calling Australia
(허영, 1943)
그대와 나(君と僕)
(허영, 1941)
기타정보
기타이름
日夏英太郞, 후융, 히나쓰 에이타로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08년 만주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함경남도 함흥이다. 1920년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히나츠 에이타로(日夏英太郞), 히나츠 에이 등의 이름으로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영화계에 진입해, 1931년 <마키노 대행전>에서 히나츠 에이타로라는 이름으로 편집을 맡았고, 1932년에는 노무라 감독의 <금색야차>의 감독보조로 참여했다. 귀국 후 내선일체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 <그대와 나(君と僕)>(1941)를 연출하였다. 이 작품은 조선과 일본에서 개봉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이 점령하던 인도네시아 자바로 가서, 일본군 포로수용소를 다룬 선전영화 <호주에의 부르는 소리>(1944)의 각본과 연출을 맡았고 일본 군부의 호평을 받았다. 일제가 패망하자 귀국을 포귀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영화교육을 담당했으며, 1950~51년 사이 <하늘과 땅 사이에>, <레스토랑의 꽃>, <스포츠 하는 여자> 등 세 편을 연출했다. 1952년 사망했다(친일인명사전).
*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3』, 민족문제연구소, 2009.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08년 출생. 일찍이 함경남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히나츠 에이타로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행세하였다. 첫 작품은 요시가와 에이지의 원작을 각색한 요시노지로 감독의 <처녀 점쟁이>였다. 이 작품의 호평에 힘입어 시대극 <붉은 박쥐> 제 1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1931년 25세 때 시나리오 작가 양성소로 알려진 마키노의 각본가 및 조감독으로 출발하면서 일본영화계에 알려지기 시작. 이후 쇼지쿠 촬영소로 옮겨 조감독이 되고, 조선총독부 소속 배우였던 다나베 쇼조를 만나게 됨으로써 <너와 나>(1944,김영길,석금성 출연)를 감독하게 되는 기회를 맞이한다. 밀항 16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만든 <너와 나>(각본 니지마 다다시)는 조선인 지원병 제 1호로 산서성 전투에서 전사한 이인석이라는 상등병을 모델로 그의 정신을 본받자는 이른바 황국신민화, 내선일체의 주제가 담긴 대표적인 친일어용영화이다. 그는 이 영화를 만든 공로로 일본국 선반원이 돼 인도네시아로 가게 되고, 현지에서 <호주를 부른다>를 연출. 이 필름은 일본 패전 후 동경 전범 재판 때 검찰측 증거로 제출되는 곡절을 겪게 된다. 해방이 되자 본명인 '허영'을 되찾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휸'이라는 이름으로 신생 인도네시아 영화와 연극의 발전에 기여하다가 병들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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