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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은기
Dog Eun-gi / 獨銀麒 / 1911 ~
본명
김영식 (Kim Young-sik)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30, 1940, 1950
DB 수정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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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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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료
군용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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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향토를 지키는 사람들
(윤용규, 1952)
군당 위원장
새로운 맹서
(신경균, 1947)
자유만세
(최인규, 1946)
남부
(uncredited)
똘똘이의 모험
(이규환, 1946)
사랑과 맹세(원제:愛と誓ひ)
(최인규,이마이 다다시, 1945)
무라이 신이치로
신풍의 아들들(원제:神風の子供達)
(최인규, 1945)
혈과 한(피와 땀)
(신경균, 1945)
우리들의 전쟁
(신경균, 1945)
거경전
(방한준, 1944)
과장
병정님
(방한준, 1944)
야스모토 에이치(康本瑛一)
주요경력
1936년 <그 후의 이도령>으로 데뷔
1939년 고려영화협회 방계 연극단체 고협에서 활동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연기과 사원
미군정기 조선영화동맹 중앙집행위원 역임
1947년 <새로운 맹서>를 끝으로 한국전쟁 발발 직전 월북
기타정보
기타이름
光成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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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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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독은기라는 예명은 영화감독 이규환이 홀로 은막의 기린아가 되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다. 영화배우로의 입문은 배우가 되기 위해 이규환 감독을 찾아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규환의 회고에 의하면, 독은기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물려받은 땅이 있던 청소년이라고 한다. 이규환의 제작지원 요청을 받아들여서 토지를 담보로 <바다여 말하라>(1935)의 제작을 지원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고, 이규환은 독은기의 토지를 찾아주기 위해서 <그 후의 이도령>(1936)을 만들었다고 한다. 다행히 이 영화로 얻은 수익으로 독은기의 토지를 찾아줄 수 있었다고 한다. 독은기는 <그 후의 이도령>으로 배우 데뷔를 하였다(이영일; 동아일보). 이어서 1938년 성봉영화원이 제작한 <군용열차>에서 이원진 역으로 출연하였다. 이외에도 <새출발>(1939), <수업료>(1940)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42년 조선영화령으로 (사)조선영화주식회사가 출범하자 연기과 사원으로 입사하였다. 이후 <조선해협>, <젊은 모습>(1943), <거경전>,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세>(1945) 등의 수많은 친일영화에 출연하였다. 해방 이후 1946년 <자유만세>, <똘똘이의 모험>, 1947년 <새로운 맹세> 등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좌익 영화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영화동맹에서 활동하였다. 1949년 국민보도연맹이 발족하자 조선영화동맹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1949년 12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 한국전쟁 중에 월북하였다(경향신문; 친일인명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 1935년 11월 5일 3면.
경향신문 1946년 10월 24일 4면.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론-성동호, 이규환, 최금동>>5, 소도, 2003.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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