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
Lee Kwang-soo / 李光洙 / 1892  ~  1950
대표분야
시나리오
활동년대
1920, 1930, 1950, 1960, 1970,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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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
유정 (김기, 1987)
(김기영, 1978)
유정 (강대진, 1976)
세조대왕 (이규웅, 1970)
재생 (강대진, 1969)
사랑 (강대진, 1968)
비료자급 (, 1967)
(장일호, 1967)
(신상옥, 1967)
유정 (김수용, 1966)

주요경력

1903년 천도교 입교
1904년 일본의 천도교 탄압을 피해 상경
1905년 일진회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행
1906년 3월 타이세이 중학교 입학, 학비 문제로 11월 일시 귀국
1907년 2월 다시 일본으로 가 메이지 학원 중학교 3학년에 편입
1909년 11월 18일 일본어로 쓴 단편 "사랑인가" 탈고, 12월 15일 발행된 메이지 학원 동창회보 《백금학보》에 수록. 이광수의 첫 작품
1910년 3월 메이지 학원 5학년 졸업,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연락에 귀국 후 오산학교 교원으로 취직
1911년 오산학교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됨
1913년 11월 세계여행을 결심 후 오산학교 퇴직 후 만주를 거쳐 상하이에 체류
1914년 6월 오산학교 복직
1915년 9월 일본 와세다 대학 고등예과 편입
1917년 1월 1일~6월 14일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 연재
1918년 <무정> 단행본 발간, 와세대 대학교 철학과 특대생으로 진학
1918년 상하이 임시정부 가담 후 와세대 대학교 중퇴
1919년 1월 신한청년당 당원으로 일본에 파견, 2월 재일 조선 청년 독립단 조직, 4월 임시정부 수립 참여
1920년 흥사단 가입
1921년 3월 상하이에서 귀국
1921년 11월~1922년 3월 《개벽》에 논문 <소년에게>를 연재하여 출판법 위반 혐의로 입건
1922년 종학원, 경성학교, 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 흥사단 국내조직 수양동맹회 결성
1923년 5월 동아일보 입사
1926년 1월 8일 수양동맹회와 동우구락부를 통합, 흥사단 국내조직 수양동우회 결성
1933년 8월 동아일보 퇴사 후 조선일보 부사장 취임
1936년 6월 1일 경성일보 초대사장 취임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입건, 6개월 징역
1938년 11월 3일 수양동우회 사건 예심 중 전향 선언
1939년 3월 14일 "북지(北支)황군 위문 사절" 후보 선거 실행위원
1939년 11월 3일 조선문인협회 발기인 및 회장
1941년 8월 25일 임전대책협의회 발기인, 9월 11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1943년 4월 17일 조선문인보국회 결성 및 이사로 선출
1944년 6월 18일 결전태세즉용 재선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
1945년 2월 11일 대화동맹 준비위원 겸 이사
1946년 9월 광동중학교 교사로 재직
1947년 1월 도산 안창호기념사업회의 의뢰로 안창호 평전 <도산 안창호> 집필, 백범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윤문 작업 참여
1948년 12월 친일행위에 대한 고백록 <나의 고백> 집필
1949년 2월 7일 반민특위 2차 검거를 통해 체포
1949년 3월 4일 '고혈압증' 등 사유로 병보석으로 출감
1950년 6월 22일 고혈압과 폐렴으로 쓰러짐
1950년 7월 5일 인민군에게 집을 차압당한 뒤 12일 납북, 10월 25일 평양에서 강계로 이송되던 중 사망

기타정보

기타이름
春園, 춘원, Y생, 가야마 미쓰로, 경서학인, 고주, 외배, 이보경, 장백, 장백산인, 춘원생, 孤舟, 李寶鏡, 香山光郞, 李廣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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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892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1917년 일본 와세다 대학교 철학과 재학 중 결핵으로 중퇴하였고, 1918년 상해임시정부에 가담한다. 1921년 조선에 돌아와 작가, 언론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흥사단 계열의 사회계몽조직인 수양동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한다. 1937년 수양동후회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전면적인 수사와 검거가 이어진 이후, 노선을 전환하여 일본제국과 대동아공영권 구상에 협력적인 글을 쓴다. 해방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출감하였으나, 1950년 한국전쟁 발발시 납북되어 사망했다고 전해진다(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1920년대부터 <개척자>(1925), <무정>(1939), <꿈>(1955), <마의태자>(1956), <단종애사>(1956), <흙>(1960), <사랑의 동명왕>(1962), <재생>(1969) 등 주요 소설 대부분이 영화화되었다. 이외 생존 당시 영화와 관련된 행적으로 1930년 9월 25일부터 10월 1일까지 동아일보에 윤백남 감독이 영화화했던 <정의는 이긴다>를 6회에 걸쳐 다시 연재소설화시켜 게재했고, 동아일보 1932년 5월 17일에는 당시 개봉중이던 W.S 밴다이크 감독의 할리우드 영화 <트레이더 혼(Trader Horn)>(1931)에 대한 감상문을 싣는 등이 있다.

* 참고문헌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92_1_0009051&isEQ=true&kristalSearchArea=B)

[작성: 황미요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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