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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룡
Lee Geum-ryong / 李錦龍 / 1906 ~ 1955
본명
김룡 (Kim Ryong)
대표분야
배우, 감독, 제작/기획
활동년대
1920, 1930, 1940,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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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어사 박문수전
(이금룡, 1930)
각본
:
어사 박문수전
(이금룡, 1930)
주요경력
1926년 조선키네마 입사
1927년 나운규프로덕션 창립작품 <잘 있거라>부터 나운규프로덕션의 모든 영화에 출연
1929년 나운규와의 불화로 나운규프로덕션 탈퇴
1932~35년 배우 경력 공백기
1936년 <역습>으로 복귀
기타정보
기타이름
이금용
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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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도서] 발굴된 과거 세번째: 병정님 DVD 소책자
by.
정종화, 한상언, 이화진
2018-08-14
발행일
2009-07-01
[영화잡지] 격월간 영화 1992년 3월호
발행일
1992-03-18
[영화잡지] 씨네팬 1961년 1월호
발행일
1961-01-0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서울에서 태어나 현철이 운영하던 조선예술학교을 나왔다. 1926년 20세 때 <아리랑>의 단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후, <풍운아>(1926)의 싸움패인 하인, <사랑을 찾아서>(1928)의 나팔 부는 노인 역할로 출연하면서 20대의 나이에 이미 노역을 맡았다. 1927년 나운규가 조선키네마를 탈퇴하고 창립한 나운규프로덕션에 합류하여, <잘 있거라>(1927)에서 처음 주역을 맡았다(동아일보a; 동아일보c; 김종원). <벙어리 삼룡>(1929), <회심곡>(1930) 등에 출연하였고, <어사 박문수전>(1930)에서는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잠시 활동이 없다가 안종화 감독의 <역습>으로 다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동아일보b; 동아일보c). 이후, <미몽>(1936), <도생록>, <한강>(1938), <성황당>(1939), <신개지>(1942) 등에 출연하였으며, 해방 후 홍성기 감독의 <열애>(1955)가 마지막 작품이다. 1949년에는 대한영화사 연기실장을 맡기도 하였다(경향신문a). 1955년 4월 3일 서울 위생병원에서 사망하였다(경향신문b). 1958년 영화인협회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금룡상(金龍賞)’을 제정하였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7년 9월 21일자 3면.
동아일보b 1936년 2월 5일자 4면.
동아일보c 1937년 7월 29일자 6면.
경향신문a 1949년 6월 19일자 2면.
경향신문b 1955년 4월 7일자 4면.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금룡. 1906년 4월 17일 서울 출생. 1924년 현철이 주도한 조선배우학교 1기 졸업생으로 복혜숙,서월영등이 이때의 동기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나 일단 술을 들면 대작하는 편이었다. 그가 영화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에 마차부로 출연하면서 부터이다. 이후 <풍운아>(1926)의 싸움패 역을 비롯, <들쥐>,<잘있거라>(1927),<사랑을 찾아서>,<옥녀>(1928),<회심곡>(1930),<역습>(1936),<도생록>,<한강>(1938),<성황당>(1939)등에 출연하였다. 스물 한 살때 <들쥐>(1927)에서 노인 역을 무난히 소화해 낸 것이 계기가 돼 이후 노역을 많이하는 배우가 되었다. 그런 이유로 주위 사람들로부터 "새파랗게 젊은이가 노인 노릇을 능청스럽게 잘해낸다."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그가 1930년 <어사 박문수전>으로 감독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청구 키네마가 제작, 손용진 촬영의 이 영화는 어려움을 딛고 암행어사가 된 한 인물의 행적을 그 자신의 기획과 각본으로 담은 통속 시대극이다. 그는 이 영화 한 편을 내놓고 연출에는 손을 떼었다. 6.25전쟁 후 홍성기 감독의 <열애>(1955)에서 목사 역을 한 것을 마지막으로 1955년 50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영화계에서는 사후 그의 업적을 기려 금룡상을 제정. 1956년 제 1회 수상자로 <피아골>(1955)의 이강천을 감독상에, <망나니비사>(1955)의 노경희를 연기상 수상자로 각각 뽑았으나 제 2회때는 해당자가 없어 시상하지 못한 채 중단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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