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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석영
An Seok-yeong / 安夕影 / 1901 ~ 1950
본명
안석주 (An Seok-joo)
대표분야
감독, 시나리오
활동년대
1920, 1930,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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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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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주식회사
흙에 열매를 맺는다
안석영
<여학생> 낭독회
필모그래피 (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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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조선에 온 포로
(안석영, 1943)
흙에 열매를 맺는다
(안석영, 1942)
지원병
(안석영, 1940)
심청
(안석영, 1937)
주요경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기타정보
기타이름
安田榮, 야스다 스카에
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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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도서] 발굴된 과거: 일제시기 극영화 모음 / 1940년대 DVD 소책자
by.
이순진
2018-08-14
발행일
2007-10-01
[발간도서] 발굴된 과거 두번째: 1930년대 조선영화 모음 DVD 소책자
by.
박혜영, 조준형
2018-08-13
발행일
2008-10-01
[발간도서] Feature Film Collection of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by.
Lee Soon-jin,
2018-08-09
발행일
2007-10-0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휘문고등보통학교 강사로 재직 중이던 1921년 <<동아일보>>에 연재되던 나도향의 소설 <환희>의 삽화를 맡으면서 삽화가가 되었다. 1922년에는 토월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엔 피스큘라 일원으로 카프의 결성에도 관여하였다(대중예술인 사전). 1925년에는 무대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극문회(劇文會) 창립에 참여하였다. 심훈, 김영팔, 고한승, 이승만 등이 함께 한 단체였다(동아일보a). 그리고 1927년에는 삽화가로서 민중운동과 발맞추어 민중예술을 고조하자는 목적으로 화가, 조각가 들이 모여 조직한 창광회(蒼光會)의 창립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조선일보a). 이밖에도 안석영은 1929년 2월에 이광수, 주요한, 김소월, 변영로, 박팔양 등과 함께 조선시가협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이 단체에서 안기영, 김동환과 함께 선전부를 담당하였다. 조선시가협회는 건전한 조선가요의 민중화를 목표로 조직된 단체였다. 기존의 노래들이 대부분 퇴폐적이고 세기말적 내용을 노래하거나 현실도피를 찬미하는 악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진취적 노래를 만들자는 단체였다(동아일보c).
작가로서, 화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던 안석영이 영화와 본격적으로 관련을 맺은 것은 심훈이 감독한 <먼동이 틀 때(어둠에서 어둠으로>(1927)에서 미술감독을 맡으면서부터였다(동아일보b). 이 영화에 미술감독으로 안석영이 참여한 것은 아마도 앞에서 언급한 극문회를 통해 심훈과 교류한 결과로 추정된다. 독특한 이력으로는 영화사 창립에 참여한 것이다. 1929년 영화제작과 외국영화배극을 목적으로 자본금 5만원에 창립된 동양영화주식회사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다(조선일보b).
하지만 안석영의 영화계 활동의 핵심은 작가로서의 역할이었다. 먼저,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안석영의 <노래하는 시절>(1930)은 이우와 안종화, 김영팔 등이 힘을 합쳐 만든 엑스키네마의 제1회 작품으로 영화화되었다. 이 작품의 내용은 도시의 영향 아래 종속된 농촌 사람들의 고민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감독은 안종화가 맡았고, 윤봉춘, 함춘하 등이 출연한 작품이었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그리고 이 시기 카프에 관여하고 있던 안석영은 조선시나라오작가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김기진, 서광제, 추적양, 석일량, 김유영 등과 함께 서울키노에 참여하였다.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 회원인 이효석, 서광제, 김유영과 공동으로 <화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였고, 이 작품은 서울키노에서 김유영의 연출로 제작되었다(조선일보e; 동아일보d).
그 다음으로는 <바다여 말하라>가 청조영화사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바다여 말하라>는 바다를 배경으로 바다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을 그린 작품으로 안석영은 원작과 각색을 담당하였다. 이규환이 감독을 맡고, 이명우가 촬영하였는데, 해금강에서 로케이션을 진행하였다(조선일보f; 조선일보g). 계속해서 1935년에는 영화시대사에서 <춘풍>을 제작하였는데, 안석영이 원작ㆍ각색을 담당하였다. 이 영화는 처녀편, 인생편으로 구성되었는데 분량이 14권에 달했다고 한다. 박기채가 감독하고 양세웅이 촬영한 이 영화에 대해, 심훈은 <춘풍>의 촬영에 있어서 이전에 나온 어떤 조선영화보다도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배우로는 이경선, 복혜숙, 문예봉, 김일해 등이 출연하였다(동아일보e; 동아일보f; 조선일보h).
안석영은 자신의 시나라오가 연속적으로 성공하자 1937년 <심청>으로 감독에 데뷔를 하였다. 이기세가 개작한 것으로 촬영은 이명우가 하였고, 배우로는 김소영, 석금성, 신은봉 등이 출연한 작품이었다(동아일보g). 두 번째 작품은 동아영화제작소가 제작한 <지원병>(1941)을 연출하였다. 박영희의 원작을 영화화 한 작품으로 <심청>과 마찬가지로 이명우가 촬영을 담당하였다. 문예봉, 이금롱, 이일해 등이 출연한 작품으로 친일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이다(동아일보h). 이밖에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제작한 김일해, 윤정란 주연의 <흙에 산다>(1942)가 있다.
해방 이후에도 문화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서울시가 시민관의 운영위원인 예술위원 10명을 선정했을 때, 현제명, 유치진, 홍찬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동아일보i). 1948년에는 대한영화협의회의 이사장으로 활동하였으며, 공보처에서 방송국의 방송내용을 강화하고자 설치한 방송기획위원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경향신문a; 자유신문). 그리고 문교부 내에 설치된 예술위원회의 영화위원으로 안종화, 이규환, 전창근, 서월영 등과 함께 선출되는 등 영화계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경향신문b). 1950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장례식은 문총장(文總葬)으로 동대문 제2운동장에서 진행되었다(경향신문c; 경향신문d).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5년 9월 14일 2면.
동아일보b 1927년 8월 13일 3면.
동아일보c 1929년 2월 25일 2면.
동아일보d 1931년 8월 1일 4면.
동아일보e 1935년 11월 23일 3면.
동아일보f 1935년 12월 4일 5면.
동아일보g 1937년 11월 10일 5면.
동아일보h 1939년 10월 26일 5면.
동아일보i 1947년 12월 10일 2면.
조선일보a 1927년 8월 29일 석간2면.
조선일보b 1929년 5월 2일 석간 3면.
조선일보c 1930년 4월 23일 석간5면.
조선일보d 1930년 9월 12일 석간5면.
조선일보e 1930년 10월 8일 석간 5면.
조선일보f 1934년 12월 3일 석간 4면.
조선일보g 1935년 1월 12일 석간 3면.
조선일보h 1935년 12월 7일 석간 4면.
경향신문a 1948년 12월 8일 3면.
경향신문b 1949년 2월 19일 3면.
경향신문c 1950년 2월 25일 2면.
경향신문d 1950년 2월 28일 2면.
자유신문 1948년 11월 21일 3면.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석주(碩柱). 1901년 4월 1일 출생인 화가이자 기자이자 시나리오 작가. 슬하에 캐나다에 거주하는 '통일의 노래' 작곡가인 장남 안병원(安丙元)을 비롯한 4남 5녀를 두었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동경미술학교에 들어갔으나 신병으로 중퇴. 모교인 휘문고보의 도화 강사로 재직중이던 1921년 나도향이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소설 '환희'의 삽화를 맡으면서 우리 나라 삽화계의 선구자가 되었다. 또한 신극 초창기의 연극인 이기세가 주재한 극단 예술좌 제 1회 공연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1922년 토월회에 가입. 신극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문예지 백조 동인이 되었으며, 1924년엔 피스큘라 일원으로 카프의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그동안 동아일보, 시대일보를 거쳐 조선일보 학예부장직을 맡았다. 이때 소설 '인간궤도'와 '춘풍'을 집필했다. 그는 이에 앞서 첫 시나리오로 <노래하는 시절>(1930)을 탈고. 안종화 감독이 영화화했고 계속해서 이규환 감독의 <바다여 말하라>(1935),박기채 감독의 <춘풍>(1935)등의 각본을 썼다. 특히 <춘풍>이 영화화되자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 시나리오 집필을 통해 쌓은 영화감각과 기량을 연출을 빌어 성취할 계획을 추진한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이기세의 기신양행이 제작한 <심청>(1937)이다. 최인규 감독과 신접살림을 하고 있던 18세의 신인 김신재를 발탁하여 주연인 김소영과 경쟁케 한 이 영화는 1938년 11월 26일 국내 최초로 열린 조선일보 영화제에서 일반관객 투표 5천 31표를 얻어 발성영화 부문 제 1위를 차지하였다. 무성영화부문 제 1위는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안석영은 "심청이가 동네 소녀들과 까막잡기를 하는데 눈먼 부친의 당당한 심정을 깨닫게 되는 묘사에 치중하려 했다. 여기서 공양미 3백 석에 몸이 팔려 가는 동기도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자연묘사에 로컬을 표현하려 하였다."(안석주 영화특집/삼천리,1948.10) 이렇게 <심청>을 감독할 당시의 의도를 피력한 바 있다. 이 영화의 일부 프린트판을 러시아 국립영상자료원으로부터 제공받아 우리 나라 영상자료원에 보존하고 있다. 이후 그는 <지원병>(1941)과 <흙에 산다>(1942) 두 편을 더 감독하였다. 최운봉, 문예봉이 주연한 <지원병>은 징병을 기피하던 한국 청년이 애인의 권유로 군대에 지원 입대한다는 군국주의 어용 계몽물이며, 김일해 주연의 <흙에 산다>는 인삼재배를 권장하기 위해 총독부가 협찬한 관제 영화이다. 해방 후엔 특별한 영화활동 없이 민주일보 편집 고문, 문화시보 주간직을 잠시 맡다가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대한영화협회 이사장(1949)을 역임하는 한편 병고를 무릅쓰고 뉴스 영화의 제작에 참여했다. 그러나 1950년 2월 24일 새벽 5시 30분 폐결핵으로 서거,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갖 50세 되던 해였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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