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규
Choi In-gyu / 崔寅奎 / 1911  ~ 
대표분야
감독, 배우, 편집, 촬영, 시나리오
활동년대
1930, 1940
DB 수정요청

필모그래피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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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파시 (최인규, 1949)
국민투표 (최인규, 1948)
장추화 무용 (최인규, 1948)
희망의 마을 (최인규, 1948)
죄없는 죄인 (최인규, 1948)
독립전야 (최인규, 1948)
자유만세 (최인규, 1946)
사랑과 맹세(원제:愛と誓ひ) (최인규,이마이 다다시, 1945)
신풍의 아들들(원제:神風の子供達) (최인규, 1945)
태양의 아이들 (최인규, 1944)

주요경력

1929년 일본에서 고향에 돌아와 신의주 신연철공주식회사 근무
1935년 신의주 신연극장에서 영사기사로 근무
1935년 3월 신의주에 형 최완규(完奎)와 함께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를 설립
1937년 경성으로 와서 녹음기사 이필우의 조수로 영화계 입문
1938년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 녹음부
1939년 조선영화인협회(朝鮮映畵人協會) 평의원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朝鮮映畵製作株式會社) 연출과원
1946년 영화감독구락부 가입
한국전쟁 때 행방불명. 납북된 것으로 추정.

기타정보

기타이름
星寅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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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1년 평안북도 영변에서 태어났으며, 평양고등보통학교(平壤高普)를 중퇴하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운전 조수 생활을 했다고 한다(친일인명사전). 1935년에 형인 최완규(崔完奎)와 함께 자본금 5만원으로 신의주 본정에 고려영화주식회사(高麗映畵株式會社)를 설립했으며 대표직을 맡았다(한국사데이터베이스). 1937년 경성으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1938년부터 조선영화주식회사(朝鮮映畵株式會社, 조영)에서 녹음부서를 담당했다(조광). 1939년 천일영화사(天一映畵社)의 제작으로, 자신이 각본을 쓴 <국경>(1939)의 연출을 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동아일보). 이후 1939년 경성일보(京城日報) 주최의 작문대회에서 총독상을 수상한 소학교 학생 우수영(禹壽榮)의 수기를 원작으로 한 <수업료>(1940)의 감독을 맡았으며, 여세를 몰아 방수원(方洙源)이 운영하던 향린원(香隣園)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집없는 천사>(1941)도 연출했다(매일신보, 삼천리). 두 작품은 모두 이창용(李創用)의 고려영화협회(高麗映畵協會)에서 제작되었다. 이후 1942년 조영, 고려영화협회 등을 포함하여 조선의 제작회사들을 통폐합한 사단법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朝鮮映畵製作株式會社)가 발족하자 연출과원으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군국주의적 내용을 담은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과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의 감독을 맡았다(친일인명사전). 해방 후 최인규는 최완규와 함께 고려영화주식회사를 재정비했으며, 1946년 <자유만세>를 시작으로 <죄없는 죄인>, <독립전야>(1948), <파시>(1949) 등 일제의 탄압과 그에 대한 민족적 저항을 담은 일련의 영화들을 감독했다. 또한 주한미군사령부 공보원의 의뢰를 받아 문화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단독정부 수립 총선거를 교육하기 위한 <인민투표>(1948), 한국의 예술과 풍물을 해외에 소개하기 위한 <장추화 무용>, <희망의 마을>(1948) 등이 그것이다(경향신문).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공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납북되었으며, 이후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친일인명사전). 영화배우 김신재(金信哉)의 남편이다.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48년 8월 8일자 2면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 5면
매일신보 1939년 7월 1일자 3면
淸秋의 映畵, 『삼천리』 제12권 제9호(1940년 10월 발행)
生長發展하는 朝鮮演藝界, 『조광』제4권 제7호(1938년 7월 발행)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3』, 민족문제연구소, 2009, 757-760쪽.
朝鮮銀行會社組合要錄(1937년판),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11년 12월 10일 평안북도 영변면 동부동 248번지에서 최태경과 이태연의 삼형제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이가 뒷날 <자유만세>를 제작한 고려영화사 대표 완규이다. 부친은 한일합방 이후 경찰관 생활을 했으나 3.1운동이 일어나자 제복을 벗었다. 영변 보통학교 6학년 때 쓴 '밤꽃'이라는 글이 전교생에게 알려질 만큼 그는 작문 솜씨가 뛰어났고 그림도 잘 그렸다. 뿐만 아니라 기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집 대청에 걸려있는 괘종을 보자 시계가 움직이는 원리에 대해 궁금하게 여겼고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시계를 뜯어봐야만 직성이 풀렸다. 5년제 평양 고등보통학교에 입학(1924)한 뒤엔 화구를 챙겨 대동강변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가 하면, 아마추어 극단을 만들어 동네 창고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이 무렵 형이 프랑스 빠테사가 만든 무성영화 <기독 일대기>를 입수하여 전국의 마을과 교회 등을 순회하며 상영했는데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필름과 영사기 등 영화의 기재를 살피며 매우 흥미로워 했다. 15세 되는 해 겨울 고향에 내려오자 독학을 하겠다며 학교를 그만 두자 자동차 운전을 배웠다. 얼마 뒤 일본 대판으로 건너가 운전 조수 생활을 하며 교토 촬영소의 입사를 노렸으나 면접시험에서 떨어지고 만다. 마침 영변에서 동룡굴을 발견한 맏형이 자동차 운전강습소를 내고 그를 교사로 불러 들이는 바람에 귀국. 한동안 자동차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형 완규가 상무로 옮긴 신의주 신연 철공주식회사의 서비스부 전문기사가 된 것이다. 1933년 스물 두 살때였다. 그러나 그는 영화에 대한 깊은 인상을 지워버릴 수 없었다. 사업수완이 좋은 형에게 고려영화사의 설립을 제의하고 그 정관 초안을 만든 것도 그였다. 우선 형으로 하여금 신극장을 임대해서 이를 개조해 양화 전문극장으로 개관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토대 아래서 1935년 3월 15일 고려영화사의 간판을 걸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의 전국 배급권을 얻어 본격적인 흥행에 나선다. 그의 영화계 진출은 1937년 3월 1일 고려영화사의 서울 이전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야심에 차있던 청년은 이미 기혼 남성이었다. 신의주 신연 철공회사 시절 타이피스트였던 18세의 김신재가 바로 그의 신부였다. 그날부터 소개받은 이필우를 따라다니며 영화인들과 사귀는 한편 녹음기술을 익혔다. 보수가 없는 조수 노릇을 자청하며 모르는 것은 꼬치꼬치 캐묻고 확인하였다. 그런데 행운을 먼저 잡은 것은 김신재였다. 안석영 감독의 <심청>(1937)에 주연으로 발탁된 것이다. 그에게는 녹음기사 이필우를 돕는 제 1조수란 직책이 주어졌다. 이듬해 <청춘부대>(1938)의 녹음을 돕고 이필우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윤봉춘 감독의 데뷔작 <도생록>(1938)의 녹음을 담당하게 된다. 이같은 녹음 행진은 이광수 원작, 박기채 감독의 <유정>(1939)까지 2년여 동안 이어졌다. 이 영화에 모두 김신재가 출연했다. 이처럼 녹음기술을 연마한 그에게 모처럼 영화감독의 기회가 돌아온 것은 1939년 천일영화사의 <국경>이었다. 당시 잡지에만 소개된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망향>(1936)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이 액션영화는 압록강변 국경지대를 무대로 전개되는 밀수단 두목과 그의 애첩,부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랑의 쟁취와 탈출을 그린 것이었다. 각본은 물론 편집,녹음 등 네 몫을 혼자 소화해냈다. 영화평론가 서광제는 이 작품에 대해 "영화적 기교는 사줄 만하나 영화적 플롯이 서지 못한 것을 찾아낼 수 있으니 전체의 오분의 일만 가지고 했더라면 영화적 플롯이 오히려 더 성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조선영화계의 총평:조광,1939.12)고 평했다. 잇따라 1940년대 한국인의 어려운 생활상을 동심의 시각으로 접근한 <수업료>(1940)와 고아원이라는 집단을 통해 사회의 그늘을 부각시킨 <집 없는 천사>(1941)를 공개했다. 전국 작문경작대회에서 조선총독상을 수상한 광주 심상소학교 4년생 노수영의 글을 원작으로 한 <수업료>는 행상을 떠난 부모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한 소년이 할머니마저 병석에 눕게 되자 가정방문차 왔던 여교사가 급우들과 합심하여 등록금을 대신 내준다는 얘기. 장명,복혜숙,김복진 등이 출연했다. <집 없는 천사>는 서울 밖 홍제리에서 부랑아들을 상대로 향린원이라는 구제사업을 하는 방수원의 실화. 동경에서 돌아오는 길에 부랑아들의 눈물겨운 생활을 목격한 그가 열정을 쏟아 이들을 돌보며 잃었던 순정을 되찾게 한다는 줄거리로 엮어져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최인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무엇으로 인하여 조선의 가로에만 거지가 낭자하여야 하는가? 이것을 영화를 통해서 다시금 일본의 위정자에게 항의하려 함이 나의 진의도였다. 이 역시 총독상을 받았고 동경서 문부대신상까지 얻었으나 일본의 기괴한 모략으로 전례없이 대신상을 취소받는 동시에 재검열로 35개소 약 2천 자의 대삭제를 당하였다"(0여년의 나의 영화 자서:삼천리,1948.9) 세 번째 작품이 나오기까지는 3년 여의 공백의 따랐다. 창씨개명, 징용징병제도가 실시되던 일제말기에 이르러 그가 내놓은 작품은 <태양의 아이들>(1944)을 비롯, <사랑의 맹세>(1945),<신풍의 아이들>(1945)등 이른바 내선일체를 강조한 친일영화였다. 김신재,최운학 주연의 <태양의 아이들>은 섬마을 국민학교의 여교사가 학생들에게 내선일체 교육을 시켜 그들로 하여금 자원 입대케 한다는 것이고, 일본배우 무라다와 문예봉이 공연한 <사랑의 맹세>는 국민학교에 부임한 일본인 교사가 학생들에게 일본 풍습을 가르치며 일본인과 같은 생활을 하도록 권장하는 내용이다. 독은기,김신재 주연의 <신풍의 아이들>은 청소년들을 공군병으로 끌어내기 위한 의도 아래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본군대의 '강제적 징용'으로 두 작품을 제작하였다고 해명했다. 아울러 명분도 제시하였다. <태양의 아이들>은 일본에 보냈던 기술자를 등용하기 위해서 였고, <사랑의 맹세>는 권세를 이용하여 촬영소를 만들고 일본 최대의 동보 영화사에서 일류 기술자와 저명한 배우를 불러다가 우리 영화인의 내일을 조성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자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앞의 출전과 같음) 일제 말기 내놓은 일련의 친일영화에 대한 면죄부적 성격을 띈 <자유만세>(1946)로 8.15 해방을 맞이한 최인규는 계속해서 <죄없는 죄인>(1948),<독립전야>(1948)등 이른바 광복 3부작을 발표했다. 전창근 황여희 주연의 <자유만세>는 광복영화기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조국의 해방과 광복을 위하여 즐거이 몸을 바친 사나이! 그를 싸고도는 다난한 세태와 인정의 교차! 해방 조선에 보내는 빛나는 순열의 꽃다발! 위대한 민족영웅의 혈투사!'라는 선전문안을 앞세운 이 영화는 애국지사가 조국광복을 눈앞에 두고 장렬하게 죽는 액션 멜로드라마이다. 국제극장의 전신인 명치좌에서 개봉돼 흥행에도 크게 성공했다. 박일용,황여희 주연의 <죄없는 죄인>은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도로서의 신앙과 민족의식을 버리지 않는 황재경 목사의 실화를 화면에 담았으며 최인규,최지애 주연의 <독립전야>는 해방과 더불어 상해에서 귀환한 딸에게 죽어가며 모든 재산을 조국건설에 써달라고 유언하는 악덕 전당포 주인의 참회 기록이다. 이 작품은 무성영화의 형식을 살려 해설과 출연자들의 대사를 변사 1인의 목소리로 녹음한 후 효과음을 넣어 현장감을 살렸으며 극 전반에 배경음악을 넣어 테마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죄 없는 죄인>은 흥행에 참패했다. 이후 미국공보원의 의로로 한국의 현대발레를 미국에 소개하기 위한 <장추화 무용>(1948)과 우리 나라의 풍물을 해외에 소개하는 홍보용 문화영화 <희망의 마을>(1948)을 내놓고, 흑산도 현지에서 촬영한 <파시>(1948)를 만들었다. 16미리 카메라를 어깨에 매고 이동촬영한 화면은 오히려 파도의 흔들림과 어울려 더욱 실감나는 영상을 이루어 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 영화는 술집 작부와 여주인, 그 밑에서 일하는 여자와 깡패, 선원 사이에서 일어나는 희노애락을 담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영화를 기술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이해한 영화작가였다. 초기에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경향을 보여주었으나 후기에 이르면서 자연을 넓게 수용하는 서정적 리얼리즘으로 전환하였다. 최인규 감독은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6.25전쟁때 납북. 그는 극영화 10편과 기록영화 3편을 남겼으며, 뒷날 영화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홍성기,신상옥,정창화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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