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전체메뉴 바로가기
하단 바로가기
로고
통합검색
검색
상세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서비스
ENG
업데이트
검색
DB
영화글
VOD
컬렉션
업데이트
DB
DB
DB 서브
상세검색
작품 DB
인명 DB
소장자료
리스트
영화제
영화글
영화글 서브
연재
한국영화의 퀴어한 허구들
비평, 안녕하십니까
그때의 내가 만났던
명탐정 KOFA: 컬렉션을 파헤치다
사사로운영화리스트
세계영화사의 순간들
임권택X102
기획
칼럼
한국영화 NOW : 영화 공간 아카이빙 프로젝트
종료연재
기관지
VOD
VOD 서브
VOD 이용안내
가이드
VOD 기획전
전체보기
영화
영화인다큐
컬렉션
고객서비스
고객서비스 서브
KMDB 이용안내
온라인 민원
1:1문의
영화인등록
FAQ
오픈API안내
이용안내
파일데이터
Open API
공지사항
로그인
마이페이지
GNB닫기
DB
이전
하길종
Ha Gil-jong / 河吉鐘 / 1941 ~ 1979
대표분야
감독
활동년대
1960, 1970
DB 수정요청
소장자료
기본정보
이미지
(26)
스틸(26)
문헌자료
(33)
도서(28)
기타자료(5)
기타
(4)
박물류(4)
이미지 (
5
)
더보기
하길종
별들의 고향(속)
병태와 영자
병태와 영자
필모그래피 (
17
)
더보기
감독
:
병태와 영자
(하길종, 1979)
속 별들의 고향
(하길종, 1978)
한네의 승천
(하길종, 1977)
여자를 찾습니다
(하길종, 1976)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
수절
(하길종, 1973)
화분
(하길종, 1972)
병사의 제전
(하길종, 1969)
수상정보
더보기
제 15회 백상예술대상 (구 한국연극영화TV예술상)(1979)
:
영화부문 특별상(
)
주요경력
서울예전 교수
관련글
더보기
[한국영화걸작선]수절: 1월의 영화
미성숙한 작가의식 <수절>(1973)은하길종 자신의 말과 글에 의해 한동안 신비화된 작품이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UCLA 대학원 동문이었으며 졸업 작품으로 MGM에서 주는 주요한 상을 받았고 귀국해서는 한국사회의 폭압성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풍 ...
by.
김영진(영화평론가)
2021-01-05
[한국영화걸작선]한네의 승천: 7월의 영화 Ⅱ
한국적인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한네의 승천>(1977)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하길종 감독의 어떤 다른 영화보다 덜 표현적이지만, 이 작품은 더 전통적인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극작가 오영진이 발표한 ‘의례3부작중 동명의 이야기를 각색해 완 ...
by.
이지현(영화평론가)
2020-07-14
연말이 무섭다~
올해는 예산을 당겨 쓰자는 정부의 방침과 더불어 예년에 비해 사업을 한 달 일찍 시작했고, 그에 따라 결과물이 조금이라도 일찍 나올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기대로 그쳤다. 객원연구원의 조사 결과와 내외부 필자의 원고를 받아야만 진행하는 작...
by.
조준형(한국영상자료원 연구부)
2009-11-10
한국영화사료관
더보기
[발간도서] 바보들의 행진 소책자
by.
조준형, 김영진, 정종화
2019-11-07
발행일
2014-12-10
[발간도서] The March of Fools
by.
Cho Jun-hyoung, Kim Young-jin, Chung Chong-hwa
2019-11-07
발행일
2014-12-10
[발간도서] Ha Kil-chong: The Dreamer for New Cinema
by.
Lee Yeonho, \Oh Young-sook, Jeong Gwa-ri, Park Hyehoung
2018-08-09
발행일
2009-10-0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41년 4월 13일 부산 초량동에서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영화배우이자 감독인 하명중은 그 집안의 막내였다. 다섯 살이었던 1945년 어머니를 여의게 되고, 한국전쟁이 터졌던 1950년, 아버지마저 잃고 만다.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린 하길종은 친척에 얹혀 살았다. 열여섯 살인 1956년 하길종은 형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 중동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인 김지하를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둘은 카뮈에 빠져있었다고 한다. 4.19가 일어난 1960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해서 김승옥, 김현, 김치수, 이청준, 염무웅, 김주연 등을 만났다. 4.19와 5.16을 겪은 하길종은 실의에 빠져 여행한 후 자비를 털어서 '태를 위한 과거분사'라는 초현실주의풍의 시집을 엮었다.
졸업 후 잠시 신필름에 입사했으나 1965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샌프란시스코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사진예술과 미술을 공부한 후, UCLA 대학원에서 MA(이론 학위)와 MFA(실기 학위)를 모두 취득했다. 이 시기에 만든 그의 단편으로는 <어느 날>(1965), <나의 환자>(1967), <병사의 제전>(1969) 등이 있다. 특히 <병사의 제전>은 당시 미국에서 불고 있던 히피 운동을 동양인인 하길종이 자기식으로 소화한 것인데, MGM 영화사가 미 전역의 최우수생 4명에게 수여하는 메이어 그랜트 상을 수상할 만큼 탁월했다고 한다.
아서 펜 감독의 연출부를 했고, UCLA의 강사직이 보장되었지만, 그는 1970년 귀국했다. 귀국 후 곧바로 김지하 각본의 <태인전쟁>을 연출하려 했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이효석 원작의 <화분>(1972)을 연출했다. 푸른 집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인물들의 성적 탐닉을 그린 이효석 원작을 하길종은 단주라는 순수한 인물에게 가해지는 집단적이고 위선적인 폭력을 고발하는 영화로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이 영화는 파졸리니 영화를 표절했다는 논란과 함께 평단에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고, 흥행에서도 실패했다. 1974년 한사군 시대의 폭군을 다룬 <수절>을 발표하지만, 역시 흥행과 비평에서 신통한 평가를 받지 못한 하길종은 새로운 전화를 다진다.
이렇게 해서 연출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은 1970년대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는 이길 수 없는 세상에 저항하는 무모한 젊음의 이야기, 그렇기에 두고두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최인호의 원작이 주는 신세대 풍속도와 낭만, 하길종의 각색이 불어넣은 시대에 대한 풍자와 허무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영화는 하길종의 전작처럼 검열에서 30분 가량이나 잘려 나갔다.
1976년 그는 청춘영화의 흐름을 나름대로 이어간, 김주영 원작의 영화 <여자를 찾습니다>를 연출하지만 비평과 흥행 모두 실패하고, 1977년에는 우수영화 선정을 노린, 오영진 원작의 <한네의 승천>을 연출했으며, 1978년에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속편 <속 별들의 고향>을 연출하고, 1979년에는 <바보들의 행진> 속편인 유작 <병태와 영자>를 연출했다. 마지막 두 작품은 최인호 원작으로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병태와 영자>가 한창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던 1979년 2월 28일, 하길종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사후 유고 수필집 '백마 타고온 또또'(예조각, 1979)와 평론집 '사회적 영상과 반사회적 영상'(전예원, 1982)이 제자 박평식의 교정을 거쳐 출간되었다.
하길종은 영화 감독 외에도 많은 활동을 했다. 고려대, 중앙대, 서라벌예대, 서울예전 등에서 영화를 강의하다가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의 교수가 되었다. 그의 제자로는 평론가 박평식, 양윤모 등이 있다. 하길종은 또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외국이론과 작가를 누구보다 일찍 국내에 소개했으며, 동료 감독의 한국 영화에 대해서도 매서운 비판을 가한 걸로 유명하다. 특히 1977년, 1978년에 월간 뿌리 깊은 나무에 연재한 월평은 특유의 직설적인 비평으로 많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비평의 일환으로 하길종은 번역도 했다. 그가 번역한 책으로는 '엑소시소트'(범우사, 1974), '뿌리'(한진출판사, 1977), '스타워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한진출판사, 1977), '캐리'(한진출판사, 1978), '미지와의 만남'(1979) 등이 있다. 하길종은 또한 영화운동가이기도 했다. 유신체제에 빠져 암흑기를 걷고 있던 영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킬 영화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975년 이장호, 김호선, 홍파, 이원세, 변인식과 함께 영상시대를 결성해 침체에 빠진 한국영화를 위해 다양한 영화운동을 벌였다.
그의 영화는 젊음의 힘과 패기가 느껴지는 영화였다. 단편이 지니고 있던 초현실주의 경향이 국내 데뷔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하길종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저항의 코드를 청년문화에서 찾았고, 그것을 시대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검열은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시 우회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문예영화를 만들기도 하고, 속편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연출한 문예영화와 속편 역시 1970년대 한국영화사에서 봤을 때 탁월한 작품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상단으로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
검색
DB
영화글
VOD
한국영화사료관
저장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