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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연남
Ha Yeon-nam / 河燕南 / 1927 ~
본명
하상남 (Ha Sang-nam)
대표분야
배우
데뷔작품
<자유만세> 1946
활동년대
1940, 1950, 1960
DB 수정요청
소장자료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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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암굴왕
(최인현, 1968)
송부인(강덕배의 처)
어떤 눈망울
(이강천, 1968)
순이
죽은 자와 산 자
(이강천, 1965)
정보부원
마도로스 박
(신경균, 1964)
유쾌한 삼형제와 사십인의 처녀
(김용덕, 1963)
명순(애기의 모)
저 언덕을 넘어서
(박성복, 1960)
지경의 처
인생대학 일년생
(윤봉춘, 1959)
안영미
결혼조건
(강찬우, 1959)
여급
추억의 목걸이
(박상호, 1959)
송정애(미경의 친구)
며느리의 죽음
(곽건, 1958)
주요경력
1946년 <자유만세>로 데뷔
1992년 독일 뉘른베르크 국제발명특허전(INEA) 발명대상
1993년 한국여성발명가협회 창립, 회장 역임
1998년 한국어머니과학발명협회 초대회장
기타정보
저술내역
『건강도 발명이 지켜왔다』
『작은 아이디어 하나로 성공한 여성 발명가들』
『역사적 발명, 그 뒷 이야기』
수상내역(기타)
1992년 독일 뉘른베르크 국제발명특허전(IENA) 대상/
2002년 독일 뉘른베르크 국제발명특허전(IENA) 대상/
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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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잡지] 신영화 1957년 12월호
발행일
1957-12-01
[영화잡지] 국제영화 1961년 12월호
발행일
1961-12-01
[영화잡지] 영화세계 1956년 6월호
발행일
1956-05-0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7년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본명은 하상남(河相南)이다. 경의여의전과 경기산파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영화 데뷔 전에는 약국과 조산원을 운영하기도 했다(효창쎄리온). 1946년 <자유만세>를 통해 영화배우로 데뷔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오른손에 큰 부상을 입고 한동안 투병생활을 해야 했으며(한겨레신문), 윤봉춘 감독의 <고향의 노래>(1954), <처녀별>(1956)에 출연하면서 복귀할 수 있었다. <처녀별>이 흥행에 크게 성공하면서 인기배우로 떠오른 그녀는 <노들강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등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66년 빙상선수 출신의 남편 이효창과 결혼한 후 함께 ‘세리온’이라는 물질을 발명하고 상용화하면서 발명가, 사업가로 전향했다(한겨레신문). 1992년과 2002년에 독일 국제특허신기술전시대회(IENA)에서 각각 대상을 받았으며, 한국여성발명가협회 초대회장, 한국어머니과학발명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한국여성발명협회, 동아일보).
* 참고문헌
동아일보 1998년 7월 30일자 10면.
한겨레신문 2008년 5월 20일자 28면.
한국여성발명협회 홈페이지 http://www.inventor.or.kr/
효창쎄리온 홈페이지 http://www.hcserion.com/
[작성: 김한상]
출처 : 여성영화인사전
하연남 河燕南
-배우. 1927년 2월 19일 충북 청주 출생. 본명 하상남(河相南). 청주여고 졸업.
평론가 허백년은 50년대를 정리하면서 하연남에 대해 그 10년 동안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오른, ‘제1대의 톱스타’로 꼽은 바 있다. <처녀별>(56, 윤봉춘) <노들 강변>(57, 신경균) <잊을 수 없는 사람들>(57, 유재원) 등 10여 편에 출연하여 청신한 연기를 보여준 하연남은, 백합과도 같이 연약하면서도 섬세한 이미지로 기억되었으나 빈틈 없이 다듬어져 있어 결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마스크는 너무나도 강한 인상을 발하곤 했다.
시대적인 유행이나 조류를 비교적 늦게 받아들이는 조용한 도시 청주의 한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하연남은 엄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여학교 시절부터 장차 영화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온 하연남은 가끔 학예회 때 연극이나 무용을 하면서 연기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청주여고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에 난 신인배우 모집 광고를 보고 상경하여 오디션을 받은 하연남은 경쟁자 298명을 당당히 물리치고 황려희와 함께 신인배우로 선발되었다, 그가 처음 출연한 영화는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46)였다.
그러나 꿈을 제대로 펴보기도 전에 하연남은, 도무지 여배우라는 직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손에 끌려 청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다시 영화를 시작하기까지는 8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야 했는데 한국전쟁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고 아버지가 죽은 후에는 집마저 파산하여 서울로 이사하는 등 수많은 일들이 그를 괴롭혔다.
하연남의 새 출발은 윤봉춘 감독과 함께 했다. 윤감독 밑에서 성실히 연기수업을 받은 하연남은 <고향의 노래>(54) <처녀별>에 출연하여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처녀별>은 하연남을 최고의 스타로 만든 영화이다. 시대극의 유행을 따라 유치진의 『별』을 영화로 옮긴 <처녀별>에서 고뇌하는 별아기의 역할을 실감나게 소화해내 영화계에서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아름다움과 성실한 연기력을 인정받아 계속해서 <노들강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등에 출연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하연남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50년대는 아쉽게도 그가 배우로서 활동했던 기간의 거의 전부가 되고 만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시나리오 작가인 김원태와 결혼하면서 점차 스크린에서 그를 보게 되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하연남은 남편이 각본, 감독, 제작한 <돈과 시간을 달라>(58)에서는 그렇게 좋은 연기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평을 들었고 오래지 않아 스크린에서 완전히 사라졌다.(여선정)
출연
-46 자유만세. -54 고향의 노래. -56 처녀별. -57 노들강변, 잊을 수 없는 사람들. -58 돈과 시간을 달라. -59 결혼조건, 인생대학 일년생, 추억의 목걸이. -60 저 언덕을 넘어서. -66 죽은 자와 산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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