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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
Hong Chan / 洪燦 / 1908 ~ 1964
대표분야
제작/기획
활동년대
1930,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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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기본정보
이미지
(8)
스틸(8)
필모그래피 (
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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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
검은 장갑의 여인
(심우섭, 1962)
전쟁과 사랑
(김묵, 1962)
군용열차
(서광제, 1938)
나그네
(이규환, 1937)
아름다운 희생
(김광주, 1933)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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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영평상)(1959)
:
공로상(
안양촬영소 건설
)
기타정보
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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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잡지] 신영화 1957년 12월호
발행일
1957-12-01
[영화잡지] 실버스크린 1965년 1월호
발행일
1965-01-01
[영화잡지] 국제영화 1962년 2월호
발행일
1962-01-25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홍찬이 영화와 인연을 맺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대략 1931년 무렵의 활동부터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어느 회고록에 의하면, 홍찬은 이구영이 감독한 <수일과 순애>에서 진행을 맡았던 것 같다(이영일). 그리고 같은 해, 조선영화연맹에서 제작하려고 했던 <명일의 여성>에도 참여한 기록이 있다. 젊은 두 여성이 철도에서 자살한 실화를 각색한 이 영화의 감독은 홍개명이었고, 각색은 김서정이 맡았다고 한다. 홍찬은 역시나 진행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중국 상해육합영편공사에서 상영할 계획도 있었다고 하는 이 영화는 개봉한 기록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봐서 실제 촬영이 진행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동아일보a). 홍찬이 본격적으로 영화계에서 활동한 것은 1930년 청구키네마가 제작한 이금룡 감독의 <어사 박문수>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조직 구성원 중에 이훈과 함께 그가 계획부 소속으로 소개되고 있기 때문이다(중외일보). 1933년 조선 영화계의 진흥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선영화예술협회의 제1회 작품으로 김광주(金光洲) 감독의 <아름다운 희생>의 제작, 지휘를 맡았다(동아일보b; 동아일보c).
1937년에는 성봉영화원과 일본의 신흥키네마의 합작하여 제작한 이규환 감독의 <나그네>에서 진행을 담당하였다. <나그네>의 전국적 흥행으로 말미암아 성봉영화원은 동인제 영화사로 재탄생하였다. 홍찬은 성봉영화원의 부족한 재원을 만회하기 위하여 일본 동보(東寶)와 제휴 계약을 체결하였다. 성봉영화원과 동보가 제휴하여 제작한 작품이 1938년 서광제가 감독한 <군용열차>였다. 홍찬은 <군용열차>의 제작을 타니구치 센키치(谷口千吉)과 함께 담당하였다. 하지만 홍찬은 성봉영화원의 의정부 스튜디오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금이 부족하자, 성봉영화원을 최남주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매각하는 비밀협상을 왕평 등과 함께 진행하였다. 이들의 비밀 행각이 밝혀지자 성봉영화원의 동인이었던 서광제, 임선규, 문예봉 등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분규가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성보영화원이 흡수되면서 일단락되었다. 1940년 조선영화령에 의해 모든 영화회사를 단일 회사로 통합하는 작업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1942년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통합회사의 진행주임으로 활약하였다(동아일보d; 조선일보; 친일인명사전).
해방 이후, 홍찬은 일본인이 경영하던 약초극장을 불하받아 수도극장으로 개명한 후 운영하였다. 그리고 1946년 11월에는 한성극장협회가 개칭한 서울시극장협의회의 이사장에 당선되어 활동하였다(자유신문; 동아일보e). 또한 1947년에는 서울시 시민관의 운영위원 10명으로 현제명, 유치진 등과 함께 선정되었으며, 1948년에는 대한영화협의회 이사로 보선되었다. 이외에도 서울시가 주재한 제1회 예술상의 연극부분 심사위원을 맡기도 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쳤다(동아일보f; 경향신문a; 동아일보g).
우익적 성향이 강했던 홍찬은 1948년 반민특위가 조직되자 노덕술 등 친일경찰들과 합세하여 반민특위 간부 및 정계 요인 암살을 통해 반민특위 와해를 위해 노력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1949년 3월에는 반민법 제7조 혐위로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구속되기도 하였다(친일인명사전; 경향신문b; 동아일보g) 홍찬은 정당 활동에도 관여하였다. 1949년 이승만을 지지하기 위해 창당된 대한국민당의 청년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는 등 이승만 정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경향신문c). 홍찬은 부자체납자로도 명성을 떨쳤다. 수도극장을 운영하면서, 체납한 세금이 1950년 2월 기사에 의하면 27,185,730원에 달했다고 한다(경향신문d; 경향신문e).
전쟁 중에는 종군 기자단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전쟁 이후에는 수도극장, 수도영화사, 평화신문사를 운영하였다. 1954년에는 외화(外畵) 수입정책을 둘러싼 갈등으로 영화계 내부의 갈등으로 인하여 홍찬은 영화배급협회 회장과 대한영화제작주식회사 이사장에서 사임하였다. 1956년에는 이 문제로 영화배급협회가 홍찬의 수도영화사에 유리하게 개정된 수입정책의 시정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이승만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하는 등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친일인명사전; 경향신문f; 동아일보h). 홍찬은 1957년에 경기도 안양에 대지 3만 2000평, 건평 5400평 규모의 안양촬영소를 건설하였다. 이때 수도영화사를 설립하여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1958, 이강천 감독)등 많은 영화를 제작하였다. 또한 평화신문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김종원). 이 안양촬영소 건설의 공을 인정받아 1959년에는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수여하는 제2회 영화 트로피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받았다. 1961년에는 제6회 국제영화공로상을 수상하였다(동아일보i; 동아일보j; 한국연예대감; 친일인명사전). 그밖에도 홍찬은 1958년 1월호부터 발행한 월간지 『현대영화』의 편집 겸 발행인을 맡았다. 『현대영화』의 주간은 허백년이었고 편집장은 이영일이었다(경향신문g). 홍찬은 1964년 2월 2일 사망하였다(경향신문h).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31년 4월 14일 4면.
동아일보b 1933년 4월 25일 4면.
동아일보c 1933년 5월 26일 1면.
동아일보d 1938년 3월 18일 5면.
동아일보e 1946년 11월 28일 2면.
동아일보f 1947년 12월 10일 2면.
동아일보g 1949년 3월 6일 2면.
동아일보h 1956년 6월 3일 3면.
동아일보i 1959년 4월 13일 4면.
동아일보j 1959년 4월 29일 4면.
조선일보 1938년 7월 20일 조간 2면.
중외일보 1930년 11월 8~12일.
자유신문 1945년 11월 22일 2면.
경향신문a 1948년 12월 8일 3면.
경향신문b 1949년 3월 5일 4면.
경향신문c 1949년 10월 15일 1면.
경향신문d 1950년 2월 7일 2면.
경향신문e 1950년 2월 14일 2면.
경향신문f 1954년 10월 15일 2면.
경향신문g 1957년 11월 15일 4면.
경향신문h 1964년 2월 3일 7면.
<<한국연예대감>>, 성영문화사, 1962.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유장산, 이경순, 이필우, 이창근 편>>, 소도, 2003.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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