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 중국 연길에서 대화심상소학교 입학, 모친 별세
1940 부친과 단둘이 내몽고 장가구(張家口市)로 이주, 심상소학교 2학년 수학 중 내몽고 후화로 이주, 3학년 경에 중국 보정으로 이주하여 부친이 재혼하고 1년 정도 거주
1942 북경으로 이주, 동성국민학교 3학년부터 5학년까지 수학
1945 연길로 이주, 입학했던 대화국민학교에서 졸업. 해방이 되자 부친이 소련군에 의해 구속되었으나 부친의 학교 동기가 도와줘서 부친 홀로 월남
1946 가족과 월남, 경주까지 갔다가 서울에서 부친을 만나서 용산에 거주하면서 경동공립중학교(현 경동고등학교) 진학, 이윽고 부친은 서북청년단원으로 홀로 제주도로 이주
1950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5학년 중퇴, 9.28 수복 당시 미군 부대에서 통역을 하던 외삼촌을 따라 미군 위생중대에서 1년 정도 생활하면서 의정부에서 이북까지 갔다가 미군 부대를 나와서 부산으로 피난
1951 부산에서 가족과 재회하고 해군신병모집에 응시하여, 12월에 해군 21기로 진해 해군신병훈련소 입소
1952 3월에 22기로 훈련소 수료하고 퇴소하여 4월에 진해 해군군악학교 4기로 입학, 가을에 휴가 나왔다가 몸을 다쳐서 진해 해군병원에서 입원치료 받고 2개월 후에 퇴원하여 진해 해군신병훈련소에서 근무
1953 국방부 정훈국 보도하사관으로 선발되어, 서울 용산구 후암동 국방부 근무. 7월 27일 휴전이 되자, 이후 정훈국 보도과 검열계 검열요원으로 근무
1955 정치대학(1959년 건국대학교로 개명) 입학, 12월 31일 해군 제대
1957~ 외삼촌의 소개로 서울 중구 인현동 태양영화사에 근무하게 되어 <진주는 천리길>(정일택, 1958) 제작 심부름을 하면서 영화계 입문. 이후 태양영화사에서 제작한 <백진주>(김명제, 1959)와 <정>(이규환, 1962), 그리고 <반역자의 비애>(이원도, 제작 서울칼라라보, 1960)에서 연출부
1961 이만희의 감독 데뷔작 <주마등>에서 조감독, <불효자>(이만희)에서 조감독 도중 제작사인 대원영화사를 떠나 신필름으로 이동하여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에서부터 이형표 감독의 조감독 활동 시작
1962 이형표 감독의 <대심청전>, <아름다운 수의> 조감독
1963 이형표 감독의 <언니는 좋겠네>, <청색아파트>, <이주사>, <말띠여대생> 조감독
1964 <연애졸업반>(이형표), <총각김치>(장일호) 조감독
1965 <정사>(장일호) 조감독, <돌아오라 내 딸 금단아>로 감독 데뷔. <여자가 더 좋아>, <의형제> 감독
1966 <만져만 봅시다> 감독
1968 <철부지아씨> 제작 및 감독, <단벌신사> 감독
1969 <산울림 칠 때마다>, <명동삼총사>, <요절검객 팔도검풍> 감독. <암행어사와 흑두건> 제작 및 감독
1972 국립영화제작소 제작과 근무. 대한뉴스, 기록영화, 안보영화, 홍보영화, 문화영화 등을 감독
1994 국립영화제작소 퇴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