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남
Yang Ju-nam / 梁柱南 / 1912  ~ 
대표분야
편집, 감독, 음향효과, 녹음
데뷔작품
미몽 1936
활동년대
1930, 1940, 1950, 1960,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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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1932년 경성 촬영소 입소
1936년 <미몽>으로 감독 데뷔
1954년 금성화랑무공훈장
1968년 공보부장관 공로표창
1972년 국방부장관 공로표창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영화에 관한 한 평소에도 관심이 많았고, 영화기자재에 대한 호기심으로 경성 촬영소에 입소, 1935년까지 조감독으로 활동하다 1936년 <미몽>으로 감독 데뷔.
주요 영화작품
아리랑 3편(1936,나운규) 편집
미몽(1936,양주남)
수업료(1940,최인규) 녹음
승리의 뜰(1940,방한준) 편집
집없는 천사(1941,최인규) 녹음
풍년가(1942,방한준) 편집,녹음
거경전(1944,방한준) 편집
처의 윤리(1941) 녹음
자유만세(1946,최인규) 편집
새로운 맹서(1947,신경균) 편집
바다의 정열(1947,서정규) 편집
민족의 절규(1948,안경호) 편집
수우(1948,안종화) 편집
푸른언덕(1948,유동일) 편집
사랑의 교실(1948,김성민) 편집
국민투표(1948,최인규) 편집
독립전야(1948,최인규) 편집
여명(1948,안종화) 편집
희망의 마을(1948,최인규) 편집
마음의 고향(1949,윤용독) 녹음
대지의 아들(1949,신경균) 편집
풍랑(1949,우현) 편집
성벽을 뚫고(1949,한형목) 편집
처녀별(1956,윤봉춘) 편집
왕자호동과 낙랑공주(1956,김소동) 편집
유전의 애수(1956,유현목) 편집
논개(1956,윤봉춘) 편집
눈나리는 밤(1958,하한수) 편집
심정(1958,이선경) 편집
마도의 향불(1958,신경균) 편집
목포의 눈물(1958,하한수) 편집
종각(1959,양주남)
회정(1960,신경균) 편집
밀양아리랑(1961,양주남)
처가살이(1965,이봉래) 편집
섬색시(1966,윤성환) 편집
애착작품 및 사유
<종각>- 감독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만든 작품으로 편집, 녹음 등 모든 제작 과정에 내 땀과 열정이 서려있는 작품이다.
영화속 명소
오래 되어서 기억이 잘 안나는데 금강산에서 영화를 찍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도 금강산은 천혜의 관광지로 이름나 있었고, 그 풍경은 가히 가관이었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당시로서는 영화종사자들이 적어 재주가 다재다능했던 나로서는 녹음, 편집등 거의 모든 영화 제작 분야에 관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당시 녹음 분야에서는 원시적인 장비였지만 영화에 혼을 불어 넣기 위해 동시 녹음을 고집하는 등 우리나라의 영화 발전을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시 영화란, 혼란스런 사회속에서 민족에게 꿈을 주는 유일한 통로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영화를 제작하였다.
수상내역(영화)
1951년 국방부장관 표창 <정의의 진격>/
1953년 금성화랑 무공훈장/
1958년 제8회 서울시 문화상/
1959년 서울시 문화상 <종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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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4년 설립된 경성촬영소에 입사하여 이필우의 녹음조수로 일하였다. 양주남은 경성촬영소의 도제 시스템을 통해 여러 기술 분야를 익힌 인물이었다. 1936년 양주남은 경성촬영소의 제6회 작품 <미몽>을 연출하면서 감독이 되었다. 그가 <미몽>을 통해 감독 데뷔를 했지만 식민지 시기 동안은 다른 작품의 감독을 맡지 않았다. 오히려 편집과 녹음 전문가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42년 조선영화령으로 (사)조선영화주식회사가 출범하자 편집 담당으로 입사하였다. 해방 직후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소속으로 <정의의 진격>(1951)등 기록영화의 제작에 참여하였으며, <배뱅이굿>(1957), <모정>, <종각>(1958), <대지의 어머니>(1960), <밀양 아리랑>(1961) 등 5편을 감독하였다. 이밖에 편집 작품으로 <수업료>(1940), <집 없는 천사>(1941), <자유만세>(1946), <마음의 고향>(1949), <피아골>(1955) 등이 있다. 1963년 퇴직할 때까지 군 영화 제작에 관여하였다. 1953년에는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영화기술자 협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을 역임하였다(한국영화인사전; 대중예술인 사전).

* 참고문헌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12년 서울 출생. 아홉 살 때 부친이 사망하여 어려운 가운데 야간으로 중등교육을 마쳤다. 1932년 이필우,이명우 형제의 주선으로 경성 촬영소에 들어가 편집을 배우고 년 뒤부터 조감독 생활을 했다. 첫 메가폰의 기회를 잡은 것은 1936년 경성 촬영소가 제작한 여섯 번째 발성영화 <미몽(迷夢)>. 일본으로 떠나는 딸의 애인(무용가)을 전송하러 가던 중 자기가 탄 차에 딸이 치고 마는 한 미망인의 비극적인 행로를 그린 문예봉,조택원 주연의 통속극이다. 이후 20여년 동안 연출에는 손을 뗀 채 <수업료>(1940,최인규),<집 없는 천사>(1941,최인규),<풍년가>(1942,방한준),<자유만세>(1946,최인규)등 영화의 편집과 녹음을 맡는 것으로 활동을 대신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국군영화제작소에 들어가 <정의의 진격>(1951)등 기록영화의 제작에 참여(편집)하는 한편, 1953년엔 임병호와 함께 영화기술자협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63년 국군영화제작소를 퇴작할때까지 <최후의 유혹>(1953,정창화),<청춘>(1953,이만흥)등을 편집했고, 1953년엔 앞의 공로 등이 인정되어 금성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사이 두 번째 극영화 <배뱅이굿>(1957,조미령,이은관 주연)을 비롯하여 <종각>(1958,허장강,문정숙 주연),<모정>(1958,이민,조미령 주연),<대지의 어머니>(1960,조미령,최무룡 주연),<밀양 아리랑>(1961,김희갑,허장강 주연)등 5편의 감독작을 만들어 냈다. 플래시 백을 시도하여 관심을 끈 오영진 시나리오의 <배뱅이굿>은 연출부에 현역 정훈장교인 김수용을 기용하여 재목감으로 양성했고, 종을 만드는 장인의 세 여자를 둘러싼 운명적 사랑을 일제하의 민족적 수난과 곁들인 <종각>은 통속적인 면도 있었으나 구성이 비교적 탄탄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모정>은 부부의 인간성에 감회되어 마음을 바로잡는 도둑의 길을, <대지의 어머니>는 남편의 전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까지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미망인의 헌신적인 모정을, 통속 시대극인 <밀양 아리랑>은 정절을 지키려다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원혼을 달래 주는 신임 사또의 선정을 각각 그리고 있다. 김수용 감독은 그의 작품에 대해 '문법에 지나치게 충실해 이미지가 유연성이 결여된 듯 보이지만 영화적 기술을 바탕으로 한 투철한 장인정신은 어설프게 외국 필름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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