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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태
Park Ho-tae / 朴鎬泰 / 1935 ~
대표분야
감독, 편집
활동년대
1960, 1970,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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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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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태
박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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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빨간 앵두 8
(박호태, 1994)
여자의 일생
(박호태, 1993)
오직 단 한번뿐인 내 인생인데
(박호태, 1992)
소녀경
(박호태, 1992)
자유여자
(박호태, 1990)
빨간 앵두 5
(박호태, 1990)
색녀도
(박호태, 1990)
빨간 색깔의 여자
(박호태, 1989)
위험한 욕정
(박호태, 1989)
이조 춘화도
(박호태, 1988)
기타정보
기타이름
朴浩泰
주요 영화작품
악명높은 사나이(1966)
인생유학생(1971)
팔도졸업생(1972)
남과여(1972)
사랑이 깊어질때(1979)
아낌없이 바쳤는데(1980)
잊어야할 그사람(1980)
자유부인81(1981)
사랑하는 자식들아(1984)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박호태는 예천 신흥중학교와 예천 농업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교내 문학 동호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작가의 꿈을 키웠던 문학청년이었다. 영화에도 관심이 많아 학교 수업이 끝난 후 곧장 영화관으로 달려갔던 영화광이었으며, 대학에 진학한 후에도 전공보다는 영화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액션물인 <악명 높은 사나이>(1966)로 감독 데뷔하였고, 이 영화가 비교적 좋은 흥행성적을 거두자 이후 액션물을 주로 연출하였다. 액션물인 <대전장>(1971), <인생유학생>(1971)까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액션영화 감독으로 안정적인 위치를 확보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그가 연출한 <격동>(1975)에는 당대 최고의 액션 스타인 신성일과 장동휘가 함께 출연하였는데, 당시 서로 같은 영화에 출연하기를 꺼렸던 두 배우가 박호태의 영화에 나란히 출연했다는 사실은 액션장르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경향신문a).
박호태는 통쾌한 액션영화로 필모그래피를 시작했으나, 1970년대 후반부터는 멜로드라마, 성인영화, 호스티스물을 주로 연출했다. 1978년에는 호스티스물인 <나는 77번 아가씨>로 서울관객 기준 20만 명을 기록하며 호스티스물 감독으로의 변신에 성공했다. 당시 외화 평균관객수가 11만명, 한국영화 평균관객수가 6만 5천명인 것을 감안했을 때 <나는 77번 아가씨>의 흥행성적은 이례적인 것이었다(동아일보b).
멜로물인 <자유부인>(1981)도 서울 기준 3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하였다(동아일보a). <자유부인>의 흥행으로 그는 1981년에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감독 중 한명이 되었다. 흥행 감독으로 인정을 받은 박호태는 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회의 지원으로 이장호, 임원식과 함께 미국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경향신문b).
이후 연출한 성인멜로물 <빨간 앵두> 시리즈는 전작들의 인기에 힘입어 5편까지 만들어졌고, 이 시리즈의 흥행으로 그는 1986년 한해에만 <자유부인2>(1986), <삼색스캔들>(1986), <빨간앵두3>(1986)를 연출하면서 성인멜로 감독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매해마다 3~5편씩 연출을 했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82년 8월 5일자 12면.
동아일보b 1978년 12월 23일자 5면.
경향신문a 1974년 11월 5일자 8면.
경향신문b 1982년 5월 11일자 12면.
한국영화감독사전
(http://www.kmdb.or.kr/movie/md_basic.asp?nation=K&p_dataid=02420)
[작성: 김성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5년 경상북도 출생. 경북대학교 경상대학 졸업. 그는 예천 신흥중학교와 예천 농업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교내 문학 동호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며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으며 또한 영화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학교 수업이 끝난 후 곧장 영화관으로 달려가는 영화광이었다. 대학에 진학 후에도 전공보다는 영화연출의 희망을 키우며 나름대로 영화공부에 몰두하였다.
데뷔작 <악명 높은 사나이>(1966)는 전쟁으로 가난에 빠진 가족들을 위해 암흑가 보스 대신 옥살이를 자청한 청년이 출감 후 풍비박산이 나버린 가족을 보고 복수를 결심한다는 내용으로 장동휘, 강문, 정애란, 황해 등이 출연한 액션물이다. 이 영화는 비교적 좋은 흥행성적을 거뒀으며 이후 비슷한 장르의 <대전장>, <유학생> 역시 흥행에서 성공하며 안정적인 자리를 잡은 그는 90년대 초반까지 약 60여 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나는 77번 아가씨>(1978)는 주로 액션전문이었던 박감독이 70년대 중반 여성영화의 붐을 타고 멜로드라마에 도전한 작품이다.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직업여성들의 갈등과 좌절을 표현한 이 영화는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히트했다. 대동흥업 영화사의 창립 작품인 <삼색 스캔들>(1986)은 사랑, 증오, 욕정에 얽힌 스캔들을 진한 에로티시즘을 통해 연출했으며 <색녀도>(1992) 역시 음욕이 남다른 여자의 애정행각을 그린 성인물이다.
그는 통쾌한 액션영화로 시작해 70년대 후반부터 진한 성인영화, 호스티스물을 주로 연출했다. <나 너> <사랑이 깊어질 때>, <순자야>(1979), <잊어야할 그 사람>, <아낌없이 바쳤는데>, <여자의 이 아픔을>(1980), <내 모든 것을 빼앗겨도>, <자유부인>(1981) <집을 나온 여인>, <유부녀>(1981), <애인>, <빨간 앵두 1-7편>(1982), <첫사랑은 못 잊어>(1983), <사랑하는 자식들아>(1984), <자유부인2>, <삼색 스캔들>(1986), <공방살 화녀>, <제2의 사춘기>(1987), <요화경>, <오성군 한음군>(1988), <색녀도>(1992)등이 주요 연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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