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화
Chung Changwha / 鄭昌和 / 1928  ~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데뷔작품
최후의 유혹 1954
활동년대
1940, 1950, 1960, 1970, 198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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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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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충열도(파계) (정창화, 1977)
심판자 (정창화,나유, 1976)
황비 (정창화, 1974)
흑무사 (정창화, 1974)
흑야괴객 (정창화, 1973)
철인(죽음의 다섯손가락) (정창화, 1972)
래여풍 (정창화, 1971)
강호여협 (정창화, 1970)
7인의 협객 (정창화, 1970)
아랑곡의 혈투 (정창화,장경파, 1970)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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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1946년-49년 최인규 감독의 문하로 영화계에 입문, 조감독
1950년 김성민 시나리오 <유혹의 거리>라는 데뷔작을 준비, 촬영과 편집을 마친 뒤 녹음을 준비하던 중 6·25 전쟁 발발, 화재로 원판이 소실됨.
1951년-52년 대구에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에 입대, 강원도 정선· 창녕 지역의 9사단으로 배치되어 활동하던 중 구사일생으로 탈출, 다시 대구에서 원대복귀를 했으나 부모님의 사고사로 인해 제대
1953년 실질적인 데뷔작이 된 <최후의 유혹>을 촬영, 부산 부민관 개봉, 흥행실패.
1956년-59년 <장화홍련전>을 시작으로 <풍운의 궁전>, <후라이보이 박사소동>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면서 액션영화 연출을 위한 기틀을 다짐 <망향>을 비롯한 한홍합작 영화 연출을 시작
1960-67년 <햇빛 쏟아지는 벌판>부터 본격적인 액션영화 연출을 시작, <지평선> 이후 만주를 무대로 하는 대륙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으며, 그 외 청춘영화를
비롯하여 특히 액션이 가미된 다양한 영화들을 연출
1967년-72년 <순간은 영원히>를 본 홍콩 쇼 브라더스사의 란란쇼 사장으로부터 스카우트, 홍콩에서 <천면마녀>, <여협매인두>, <아랑곡> 등 무협영화 성공
1972년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연출, 할리우드 박스 오피스에서 1위
1973년-77년 골든 하베스트로 이적한 뒤 <흑야괴객>, <황비홍소림권>등을 연출
1978년 한국으로 돌아와 화풍흥업주식회사를 설립. 1986년까지 29편 제작
1981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부회장
1982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이사
1983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이사
1996년 미국으로 이주
2003년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에서 『한국 액션영화의 전설, 정창화!』개최
2004년 홍콩필름아카이브에서 회고전 개최, 파리인터내셔널 필름 페스티발에서 회고전 개최
2005년 칸 영화제 클래식 섹션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 초청됨
200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장편 심사위원장 역임
2008년 춘사영화제 심사위원장 역임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해방 이듬해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를 보고 감명을 받는다. 감독의 재치와 기교에 매료되어 어떻게 해서든지 최인규 감독 밑에서 영화연출 수업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운이 따랐는지 부친과 최감독의 형이 친분이 있어 그분의 소개로 최인규 감독을 만나게 된다.
애착작품 및 사유
<햇빛 쏟아지는 벌판>을 가장 아낀다. 미국 대형영화들이 영화계를 석권할 때 우리 관객들을 모으기 위해 중국벌판을 무대로 한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지평선>과 같은 대륙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홍콩에서 <아랑곡:한국제목:아랑곡의 혈투>이란 무협영화를 만들었는데 당시 홍콩은 장철, 호금전 등 무협영화의 전성기였다. <아랑곡>은 이방인인 한국 사람도 무협영화를 잘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든 작품이다. 이후 무협, 현대 액션영화 장르에 매진하다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통해 그간 정립한 연출력의 정점을 보여주고자 노력했다. 나름대로 색다른 영화를 만들어보고자 중국역사서를 뒤져 신비한 이야기를 찾아 자료를 구해 만든 작품이다.
영화속 명소
<사르빈강에 노을이 지다>는 버마 로케이션을 필요로 했지만 당시 제작여건은 이것을 허용하지 않아 광릉에 열대수를 심어 밀림지대를 재현했다. 또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자비를 들여 인천 월미도 옆 무인도에서 촬영을 했다. <장희빈>에서 귀향가는 행렬을 잠실에서 촬영했는데 당시 잠실은 아무 것도 없는 벌판이었다. <햇빛 쏟아지는 벌판>의 중국거리를 재현한 오픈세트는 돈암동에 지어서 촬영했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한국 액션영화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액션영화뿐만 아니라 멜로드라마, 사극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으며,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액션영화에도 잔인한 장면을 피하고 철학이 담긴 따뜻한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50년대 한국영화의 많은 대사와 느린 템포를 탈피하고자 액션영화에 천착하게 된다. 이 장르를 통해 현실에서는 이룰 수없는 어른들의 꿈을 그리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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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양한 장르를 버무린 대중영화의 정석 <킬 빌 Kill Bill>에 영향을 준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이 떠올랐을까. <노다지>(정창화, 1961)도 액션 활극인 줄 알았다. 제목만 보면 노다지에 눈이 멀어 금광에서 사투를 벌이는 남자들의 욕망과 배신 그리고 우정을 다룬 이야기거나, 노다... by.김성훈(씨네21 기자) 2015-11-24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경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음악에 재능이 있어 1945년 서울음악전문학원에 들어갔으나, 최인규 감독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면서 그만 두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에 입대하여 활동했다고 하며, 1953년 <최후의 유혹>으로 감독 데뷔했다. 이후 <장화홍련전>(1956)이 흥행에 성공했고,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부터는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노다지>, <지평선>(1961), <수색대>(1964), <사르빈 강에 노을이 진다>(1965) 등에서 독특한 액션 연출 스타일을 만들어갔고, 한?홍합작 영화 <순간은 영원히>(1966)를 본 홍콩 쇼브라더스사가 스카우트를 제의하게 된다. 홍콩에서 그는 <천면마녀>(1969), <아랑곡의 혈투>(1970), <죽음의 다섯 손가락>(1972) 등 액션, 무협영화를 만들었으며, 그중 특히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미국 개봉 첫 주 흥행 1위 기록을 세우며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쇼브라더스에서 골든하베스트로 이적한 후에도 <흑야괴객>(1973) 등 네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고 한다. 1978년 귀국한 후에는 화풍흥업주식회사를 설립했으며, 1986년까지 29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이사,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자협회 이사 등을 역임했으며, 1996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살고 있다(한국영상자료원).

* 참고문헌
한국영상자료원 편, 『2008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정창화』, 한국영상자료원, 2008, 13-25쪽.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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