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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일민
Yang Il-min / 梁一民 / 1928 ~
본명
양종호 (Yang Jong-ho)
대표분야
배우
데뷔작품
북위 38도(일명 육탄십용사) 1948
활동년대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DB 수정요청
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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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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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4회 대종상 영화제(1996)
:
특별연기상(
)
주요경력
1928년 서울 고양군 뚝도면 동뚝도리 636번지 출생
1943년 <우르러라 창공(仰"大空)>(김영화, 나웅, 1943)>에 아역 단역으로 출연
194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46~49년 국학대학 국문과 입학, 졸업. 연극부 활동. 극단 신협 입단
1947년 라디오 방송국 성우로 입사
1949년 대한영화사 전속배우. <북위38도(일명 육탄십용사)>로 데뷔
1950~51년 군정훈부 대북방송 활동. 대구 공군 연극대 활동
1954년 조항이, 성소민과 더불어 대한영화배우협회 창립
1963년구룡프로덕션 설립, 영화 <미행자>(장황연, 1963) 제작, 기획
1960년대 말 극단 일월(日月) 조직, 키노드라마 기획 전국순회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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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대학 연극부 활동 후 극단 '신협'에 입단 그 후 성우로 방송사에 입사. 친구의 권유로 배우로 입문.
애착작품 및 사유
57년 '오발탄'. 주연급으로 캐스팅 되어 그 당시의 사회상을 리얼하게 묘사했다.
하고싶은 말
1. 배우는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가?
-그 시대의 역사를 압축해서 전하는 사람이며, 그런 사명에 자부심을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사람이다.
2. 영화계의 발전 방향은?
-나이든 배우들도 다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젊은 사람만이 주인공인 것이 아닌, 연로한 주인공이 나오는 시나리오와 그것을 만드는 제작자들이 많아지기를 원한다.
3. 후배 연기자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좋은 연기를 배우기 위해서는 모든 배역을 골고루 맡아서 해보아야 한다.
영화속 명소
'울릉도'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소박하고 순수한 연기를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과 캐스팅 여건 상의 어려움으로 액션을 많이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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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사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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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잡지] 격월간 영화 1988년 1월호
발행일
1988-01-05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8년 서울 고양군에서 출생하여 국학대학 국문과를 졸업했다. 극단 신협(新劇協議會)에서 연기 공부를 하고, 1947년 서울중앙방송국에 입사해 성우로 활동하기도 했다. 1949년 대한영화사 전속 배우가 되었고, <북위 38도>(1949)로 데뷔했다. 이후 신경균의 <삼천만의 꽃다발>(1951), 장황연의 <고향의 등불>(1953), 이규환의 <춘향전>(1955), 윤대룡의 <검사와 여선생>(1958) 등 1950년대 작품뿐만 아니라, 강대진의 <박서방>(1960), 박상호의 <또순이>(1963), 정창화의 <광야의 결사대>(1966), 김수용의 <까치소리>(1967), 편거영의 <돌아온 팔도사나이>(1969) 등의 1960년대 영화에도 활발하게 출연했다. 1954년에는 대한영화배우협회 설립에 참여했으며, 1960년대에는 구룡프로덕션을 설립해 장황의 <미행자>(1963)를 기획하기도 했다(한국영상자료원). 그는 필모그래피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쳐 2005년 송경식 감독의 <대한민국 헌법1조>로 이어지며, 원로배우로서 노익장을 과시하는 몇 안 되는 배우이다.
* 참고문헌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2』, 이채, 2006.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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