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스트 김
Twist Kim / 1936  ~  2010
본명
김한섭 (Kim Han-sup)
대표분야
배우
데뷔작품
정확히 기억이 안남 1959
활동년대
1960, 1970, 1980, 199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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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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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수사반장 트위스트김 (김태윤, 2001) 김형사
그림일기 (고영남, 2000) 감독
공포특급 (김희철,강제규, 1994)
사랑의 종합병원 (박광우, 1993) 글로리아
남부군 (정지영, 1990) 황대용
동경 아리랑 (손창호, 1990) 브로커 권
깜보 (이황림, 1986) 쟈가
도시로 간 처녀 (김수용, 1981)
종점 (정인엽, 1981)
마음약해서 (심우섭, 1979) 장고성

수상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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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패케이지 쇼단결성(1970-80)
1989년,1990년 철인 삼종경기 연령별 우승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어릴적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배우가 되고 싶었다. 때문에 길거리에서 영화 촬영하는 것을 볼때면 시선을 끌기위해 소리도 지르고 연기흉내도 내었다. 그러다 신상옥감독님이 영화촬영을 하다가 나를 보고 명함을 주셨다. 그후 신필름에 연구생으로 들어가서 지금까지 영화를 하고 있다. 트위스트 김이란 예명 역시 신상옥감독님이 지어주셨다. 이춤을 처음본것은 경남극장의 대한 뉴스 시간에 잠깐 소개되었은때였다. 그것을 보고 혼자서 열심히 연습해 두었다. <아름다운수의>를 촬영하던 대천 해수욕장에서 이춤을 추었는데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했고 감독님도 흥미를 보였다. 그것을 계기로 내가 맡았던 영식이란 이름이 트위스트김으로 바뀌었고 원안에 없던 캬바레 장면까지 삽입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이름으로 지내고 있다.
주요 영화작품
5인의 해병(1961,김기덕감독)
맨발의 청춘(1964,김기덕감독)
행주치마(1964,이봉래감독)
해병특공대(1965,강민호감독)
압록강아 말하라(1965,강민호감독)
불타는 청춘(1966,김기덕감독)
소령 강재구(1966,고영남감독)
귀신잡는 해병(1966,김응천감독)
초우(1966,정진우감독)
위험한 청춘(1966,정창화감독)
오늘은 왕(1966,김기덕감독)
닐니리(1966,임권택감독)
검은 무늬의 마후라(1966,김기덕감독)
청춘대학(1966,김응천감독)
미련(1967,고영남감독)
맨주먹 청춘(1967,김기덕감독)
내일은 웃자(1967,박종호감독)
회심(1968,정인엽감독)
연애도적(1971,신상옥감독,엄 준감독)
폭력은 없다(1975,박노식감독)
깜보(1986,이황림감독)
남부군(1990,정지영감독)
사랑의 종합병원(1993,박광우감독)
보석도적(1969)
주요기타작품
■ 주요작품(TV)
수사반장
두형사(주연)
박순경
전원일기
대추나무사랑걸렸네
L.A 아리랑
일지매

■ 주요작품(CF)
락토우유
고려인삼
애착작품 및 사유
<소령강제구>란 작품이다. 이작품은 실제 인물의이야기를 다룬것으로 나의 배역도 실제 인물이었던 향식이란 역이었다.
<불타는청춘>맨발의청춘후 바로 만든 작품으로 이 작품에서는 내 배역이 신성일씨의 역보다 비중이 컸다.
<보석도적>외1편 이작품은일본감독인 이노우우메이지가 영화에 출연한 나를 보고 픽업해서 만든영화였다. 말하자면 배우로써 처음으로 일본에 진출한 것이다. 당시에 일본진출은 지금과 달리 극비 사항이었는데 지금 같았으면 언론의 화제가 되었을 것이다.
영화속 명소
위문공연갔던 베트남이 인상에 남는다. 육영수여사께서 제안해서 이루어진 공연으로 싸이공에서 다른 연예인들과 함께공연했다. 당시 플래카드에는 `육영수여사의선물 트위스트 킴'이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때 공연과 함께 일일 장병체험까지 했는데 국군들의 사기 진작에 일조했다는 생각에 보람이 느껴진다. 또 사우디아라비아 역시 기억에 남는다. 80년대 외화를 벌기 위해 근로자들을 위문하는공연이었는데 근로자들의 환호속에서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다. 우리들의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근로자들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60년대식 연기를 지금한다면 매우 어색할 것이다. 80년대에 맞는 연기, 90년대에 맞는연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연기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고 본다. 시대에 변화에 맞춰 변화된 연기를 하려면 끊임없이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소개 및 취미
스포츠, 댄스등 모든 것에 능란하다. 이렇게 여러가지를 할수있게 된것은 신상옥감독님의 배려에 의한 것이다. 감독님은 배우가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그에 수반되어 여러가지 활동에도 능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연구생들에게 스포츠, 승마등 여러가지를 배우게 하셨다. 그분의 혜안에 늘 감사하는마음을 가지고 있다.
취미: 음악감상, 여행
특기: 승마, 사이클, 수영, 사격, 드럼, 하모니카, 외국어(일어), 사투리(전라도,경상도,평양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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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영화배우를 꿈꾸었던 트위스트 김은 신상옥 감독의 영화촬영장을 찾았다가 신상옥 감독에게 픽업되었다. 트위스트 김이란 이름은 대천해수욕장에서 <아름다운 수의>(1962)를 촬영할 때 영화에 출연한 그가 트위스트 춤을 추었는데 이것을 본 신상옥 감독이 예명으로 지어준 것이다. 경남극장에서 대한뉴스 시간에 나온 트위스트 춤을 보고 매료되어 연습을 해둔 것이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다. 트위스트 춤으로 <아름다운 수의>에서 그의 극중 이름인 ‘영식’이 ‘트위스트 김’으로 바뀌었고 원안에 없던 캬바레 춤 장면까지 삽입되었다(한국영상자료원).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맨발의 청춘>(1964)을 통해서였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영화에서 그가 선보인 트위스트 춤이 유행하면서 스타덤에 올랐다. 그는 전국 춤꾼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한 실력 있는 춤꾼이었다(중앙일보).
트위스트 김은 이후 청춘영화와 코미디영화에서 개성파 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소령 강재구>(1966)에서는 주연인 신성일보다 역할 비중이 더 많았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높았다. 그는 <연애도적(戀愛盜賊>(이노우에 우메츠구(井上梅次),1971)이란 신필름과 쇼브라더스의 합작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한국영상자료원). 19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내던 그는 197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자 영화계를 떠나 밤무대에 서기도 했다(맥스뉴스). 1980년대 이후에는 TV드라마에서 악역으로 자주 출연했다.
트위스트 김은 외상성 뇌출혈로 4년 넘게 투병생활을 하다가 2010년 11월 30일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뉴스엔). 2005년 일일 드라마 「맨발의 청춘」이 그의 마지막 출연작이었다(맥스뉴스).

* 참고문헌
경향신문 1986년 4월 11일자 5면.
매일경제 1970년 3월 4일자 4면.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설문조사, 2001.
“[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41) 트위스트 김”, 중앙일보, 2011/06/20.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5661287&cloc=olink|article|default)
“故트위스트김 발인 ‘운구 들 사람도 없었다’ ”, 뉴스엔, 2010/12/02.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12021443451003)
“트위스트 김을 아시나요?”, 맥스뉴스, 2010/12/02.
(http://www.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newsType=&page=&contain=&keyword=&mi_id=MI0090924396)

[작성: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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