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고성
Dokgo Sung / 獨孤聲 / 1929  ~  2004
본명
전원윤 (Jeon Won-yun)
대표분야
배우, 제작/기획
데뷔작품
격퇴 1955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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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천의 얼굴을 가진 사나이, 영화배우 박노식 (조명화, 2003) 인터뷰
깡패수업 3 (조성구, 2000) 황보스
(정지영, 1998) 할아버지
투맨 (박광우, 1996) 파파
네 멋대로 해라 (오석근, 1991) 두목
잡초들의 봄 (문여송, 1989) 준길
대물 (송영수, 1988)
청(블루스케치) (이규형, 1986) 특별출연
이브의 체험 (곽정환, 1985)
이 한몸 돌이 되어 (최무룡, 1983)

주요경력

1949 극단 신협 입단
서라벌예대 재학중인 1950년 전국 신인남녀 가수 콩쿨대회 1등 입상, 가수 활동
6.25사변 당시 육군 군예대 악극단 활동
1955 영화<격퇴>로 영화 데뷔
영화인협회이사 25년간 역임
현재 한국참전예술인협회 상임부회장과 세계평화스마일운동 총본부 부회장 역임.

기타정보

영화계 입문배경
1950년 5월 서라벌예대 재학중에 전국신인남녀가수 콩쿨대회에서 1등으로 당선되어 고려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활동하다가, 6.25사변이 발발하여 육군 군예대에서 1955년 초까지 악극단활동을 하던 중 1955년 이강천 감독의 "격퇴"에서 박노식씨와 같이 영화에 데뷔하게 되었다.
주요기타작품
■ 연극
햄릿(1949)
애착작품 및 사유
첫 주연을 맡은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너를 노리고 있다"를 들수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왕십리에서 셋방살이를 할 정도로 고생하면서 조연이나 단역으로 배우생활을 하던 중에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이다. 당시 냉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릴 정도로 많은 노력을 들인 작품이었다. 결과는 아세아극장에서 약 7만2천명의 관객이 들었을 정도로 대성공이었고 이 작품으로 인해 스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너를 노리고 있다"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바로 다음에 출연한 작품으로 반공검사역할로, 남파간첩역할을 맡았던 박노식씨에게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가는 중 배가 폭파되어 바다에서 표류하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당시 여배우와 실제로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있을 정도로 많은 고생을 한 작품이었다.
하고싶은 말
한창 활동하던 60년대의 배우활동을 하던 상황보다는 지금의 배우의 여건이 좋아진것은 사실이다. 그 당시는 위험한 액션연기도 배우 스스로 해야할 정도로 몸으로 직접 뛰는 일이 많았다. 지금 활동하는 많은 배우들이 좋은 여건에서 후배들을 많이 아끼고 격려하며 더욱 많이 노력을 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영화속 명소
많은 영화촬영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장소를 가보아서 실제로 지금 기억에 남는 장소를 별로 없다고 할 수 있다. 굳이 떠올리자면 "영"을 촬영할 당시 경기도 일대의 초가집촌이 기억이 남는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지만 당시에 초가집만 50채가 있는 풍경이 매우 인상깊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일제시대에 얼음창고로 사용하던 마포의 창고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안이 4층으로 되어 있었고, 매우 웅장해서 60년대의 왠만한 액션영화의 촬영은 모두 그 곳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단역배우부터 시작을 했기 때문에 많은 배역을 맡았었다. 주로 악발이같은 악역역할을 많이 맡았었다. 깡패두목역할을 많이 하다보니 감독들이 주로 악역을 많이 의뢰해서, 실제의 이미지도 영화속의 악역의 이미지로 보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실제 사생활만큼은 공인으로서 성실하고 건전하게 해야되겠다고 결심했다. 자녀교육 또한 엄하게 철저히 시키는 편이었다.
자기소개 및 취미
1949년도 극단 신협에 입단. 서라벌예대 재학중 전국신인 남녀가수 콩쿨대회(신부좌)에서 1등당선. 고려레코드회사 전속가수 입사. 6.25사변으로 대구피난 대구에서 육군군예대(KAS)악극단에 입단해서 5년간 활동중 1955년 극영화 격퇴(이강천감독)로 데뷔 현재까지 활동중.
취미: 승마
특기: 축구, 가요, 사교춤, 기타, 사투리(강원도)
수상내역(영화)
연예잡지사에서 인기상,조연상(1960)/영화인 유공상(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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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9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전원윤(全元潤)이다(김기제).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했으며, 대학 재학 중에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입상한 것을 계기로 고려레코드회사 전속가수로 활동했다(한국영상자료원). 한국전쟁 기간 중 육군 군예대(軍藝隊)와 창공(蒼空), 태평양(太平洋) 등의 악극단 생활을 거친 후 1956년 이강천 감독의 <격퇴>로 영화배우로 데뷔했다(한국영상자료원, 김기제). 이후 김을백 감독의 <72호의 죄수>(1959)에서 주연을 맡았으며, 김기덕의 <5인의 해병>(1961), 이만희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 등에서의 군인 역할과 이만희의 <검은 머리>(1964), 이신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65), 이상언의 <현금은 내 것이다>(1965) 등에서의 암흑가 일원 역할로 개성 있는 배우로 자리 잡았다. 그는 특히 장동휘, 박노식, 허장강, 황해 등과 함께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의 액션영화 붐을 대표하는 액션 배우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참여 작품이 줄었지만 오석근의 <네 멋대로 해라>(1991), 박광우의 <투맨>(1996)에 출연하는 등 90년대까지 꾸준히 활동을 했다. 2004년 지병으로 별세했으며, 배우 독고영재가 큰 아들이다(연합뉴스).

* 참고문헌
연합뉴스 2004년 4월 11일자
김기제 편, 『한국연예대감』, 성영문화사, 1962, 189쪽.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KMDb 설문조사, 2001.

[작성: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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