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에 따른 분류

영화제작자 이재명 컬렉션

▶ 한국영상자료원은 2020년에 영화제작자 이재명(李載明, 1908~1987)의 가족이 보관하고 있던 사진첩을 기증받았습니다. 한국영화 산업에서 프로듀서의 역할이 전면에 부각되는 것은 1990년대부터라고 이야기되지만, 영화 프로듀서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은 1930년대 중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발성영화 시대를 맞이한 영화계는 ‘영화 기업화’를 기치로 내걸고 전문화와 분업화를 추구하는 흐름이 나타났습니다. 이재명은 이 시기에 조선에서는 유일한 주식회사로 설립된 영화사 ‘조선영화주식회사(조영)’의 지배인 겸 제작부장으로 일하면서 프로듀서의 길을 닦은 인물입니다. 

그는 영화 <무정>(박기채, 1939)을 제작했고, <춘향전>(무라야마 도모요시 村山知義 각본·감독 예정)의 영화화를 추진했으며, 의정부촬영소에서 촬영되는 영화의 제작을 총괄했습니다. 조선총독부에 의해 회사가 강제로 해산된 후에는 국책영화사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 입사해 조선인들이 중심이 된 선전영화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제작을 맡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여러 편의 문화영화와 극영화를 제작하며 제작자로서 경력을 이어갔지만, 제작자로서 제일선에서 활동한 전성기는 영화를 둘러싸고 기술과 산업, 국가의 관계성이 긴밀해지던 1930년대와 1940년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전에 이재명이 소장했던 사진첩에는 그가 몸담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와 관련된 사진 수십 점을 비롯해 일제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영화 제작자 이재명의 활동을 기록한 사진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영화제작자 이재명 컬렉션”은 사진 65점이 수록된 사진첩 1권과 낱장의 사진 8점, 총 73점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사진들은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습니다. 

첫째, 조선영화주식회사가 제작한 영화 및 미완의 기획들
둘째, 조선영화주식회사 의정부촬영소
셋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선전영화
넷째, 해방 후 제작자 이재명
다섯째, 이재명 개인과 가족, 동료들의 사진

컬렉션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영화주식회사는 1937년 7월에 공식적으로 회사 등록을 마친 때부터 1941년 9월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회사가 해산될 때까지 4년 여간 <무정>(박기채, 1939), <새출발>(이규환, 1939), <수선화>(김유영, 1940), 세 편만을 조영의 이름으로 공개했습니다. 의욕적인 감독과 기술진과 함께 새로운 조선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를 품고 시작한 조영에 대한 사회적 기대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당시에도 조영의 내실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춘향전>과 <풍년기>, <여학생>과 같은 작품들 역시 비록 미완으로 그쳤지만 조영의 이름으로 기획된 영화들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제작이 완료되어 대중에 공개된 영화를 중심으로 영화의 역사를 구성하게 됩니다. 끝내 제작되지 못한 기획들은 대부분 흔적도 없이 기억 속에서도 사라져버리죠. 그러나 영화제작자 이재명의 사진첩에는 그렇게 사라져버렸을, 무산된 기획들마저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재명은 감독도 배우도 기술진도 아니지만, 영화 제작의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했던 프로듀서의 삶을 한 권의 사진첩으로 묶어 오랫동안 보관했습니다. 자본도 인력도 기술도 부족했고 기자재와 설비도 충분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열정으로 충만했던 영화인들의 시간을 “영화제작자 이재명 컬렉션”을 통해 여행해 보기를 권합니다.
 

※ 컬렉션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 게시물 하단에 첨부된 [해제 다운로드]를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 개별 자료에 대한 세부 정보 및 상세 해설은 아래 ‘자료 목록’의 자료명을 클릭하면 보실 수 있습니다. 
    ‘자료 목록’의 순번은 사진첩 수록 순서(#1~65)이며, 낱장 사진(#66~73)은 사진첩 수록 사진 뒤에 시기 순으로 배열한 것입니다.
 
- 조사·연구: 이화진(영화사연구자)
- 기획·진행: 이지윤(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영화제작자 이재명 활동 연보>
1908년    전라남도 함평 출생
1926년    ‘함평소년단’ 부단장 역임
19**년       목포 전수상업학교 졸업
1930년    일본 도쿄 P.C.L 프로덕션(도호영화사 전신) 촬영소 견습생
19**년       재일본 조선인 극단 ‘3·1극장’ 활동
1937년    조선 귀국 / 조선영화주식회사(사장 최남주) 지배인 겸 촬영소장 역임
1938년    조선영화주식회사 의정부촬영소 개소 및 의정부촬영소 제작부장 역임 / 영화 <무정> · <춘향전> · <풍년기> 기획
1939년    영화 <여학생>(안석영, 미완성) · <새출발>(이규환) 기획
1940년    영화 <수선화>(김유영) 제작
1941년    영화 <아내의 윤리>(김영화) 기획 / 조선영화주식회사 강제 해산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제작과장 겸 촬영기술과장 역임 / 영화 <흙에 열매를 맺는다>(안석영) 제작
1943년    영화 <조선해협>(박기채) 기획
1944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조선영화배급사 합병, 조선영화사 창립
1945년    해방 후 ‘적산(敵産)’ 조선영화사 인수, 이사장 취임
1946년    문화영화 <신라의 고분> · <제주도 풍토기>(이용민) 제작
1947년    서울영화주식회사 설립, 대표 역임
1948년    문화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제작
1949년    문화영화 <목동과 금시계>(이용민) 제작
1956년    아세아영화주식회사 설립, 대표 역임 / 대한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역임
1957년    영화 <산유화>(이용민) 제작
1958년    영화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 제작
1959년    영화 <이름없는 별들>(김강윤) 제작
1960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역임
1961년    영화 <먼동이 틀 때>(김묵) 제작 / 문화공보부 영화분과위원회 위원장 역임
1962년    영화 <여자의 일생>(신경균) 제작 / 주한 미국 공보원 후원, 대한문화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역임 
1963년    영화 <흑산도>(한홍열), 문화영화 <농업> 제작 / 사단법인 대한문화영화업자협회 창립, 사장 역임
1964년    문화영화 <송리산 법주사> 제작
1965년    문화영화 <수도 이야기> · <제주도를 찾아서> · <한국의 운송업> 제작
1966년    문화영화 <한글> · <운송이야기>, 영화 <악인가>(최영철) 제작
1967년    한국영화업자협회 공로 표창 수훈
1970년    문화공보부장관 공로 표창 수훈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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